루터파 목사 한 명이 목회 활동을 하다가 중앙부처 교회로 전직했다. 이어 공안을 담당하던 제국 보안청의 교회 담당관으로 파견됐고, 수용소 소장으로 근무하더니 결국 러시아 전선에서 학살특공대 부대장으로 나서서 유대인을 죽이는 데 앞장섰다.
황당하지만 실제 있었던 일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던 독일에서는 이 같은 일이 비일비재했다. 치안경찰은 게토의 경비경찰관으로, 화학자는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 감시 및 학살에 일조했다. 미국 버몬트 주립대학에서 평생 홀로코스트를 연구한 라울 힐베르크의 말대로 그들은 '파괴 기계'로 전락한 것이다.
힐베르크의 역작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개마고원 펴냄. 전2권)가 국내 처음 번역돼 출간됐다. 1961년 출간된 이 책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 아이히만 - 악의 진부성에 대한 보고서'와 함께 나치 대학살에 관한 기념비적 연구로 평가받고 있다.
저자는 5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지를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를 중심으로 분석한다. 이를 실증하기 위해 그는 120여 개의 도표와 각종 자료를 인용한다. 사례 분석에 치중하다 보니 내용도 길다. 1천700여 쪽에 이를 정도로 방대한 양이다.
저자는 나치의 파괴 기계가 "조직화된 독일 사회 전체"와 일치했다고 주장한다. 독일에는 유대인 문제를 전담하는 단일한 나치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삶과 직간접으로 관계하고 있던 모든 독일인이 파괴 과정에 연루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즉, 학살이란 어떤 특정한 사건이나 계기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거의 모든 집단이 축적해온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독자적으로 움직이지만 궁극적으로 상호 조율되는 정부, 군대, 당, 기업의 관료제적 복합체가 유대인 학살을 저질렀다"는 설명도 곁들인다.
유대인 학살에 침묵한 당대 지식인에 대한 비판도 제기된다. 특히 비판적 지식인으로 명성을 떨쳤던 피카소, 샤르트르에 대해서 "피카소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고, 샤르트르는 극본을 썼다"고 말한다. 지식인인 그들조차 거의 모든 사람이 동참했던 '학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이다.
'일반 사람들도 유대인 학살의 가해자였다'는 이 같은 명제는 악의 평범성 개념을 창안한 아렌트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역자인 김학이 동아대 사학과 교수는 '예루살렘 아이히만'을 쓰면서 아렌트가 힐베르크의 연구에 크게 의존했다고 주장한다. 두 책을 분석해 본 김 교수는 아렌트의 저작이 "심지어 표절의 느낌이 들 정도"라고 말한다.
각권 816-916쪽. 각권 3만8천원-4만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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