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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용의 기행에세이] (24)논산 강경~군산

역사의 피해자와 가해자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옥녀봉에서 바라본 강경 포구와 논강평야. ([email protected])

서해는 언제나 신생하는 바다라고 할 수 있다.

 

한반도의 강줄기 대부분이 서남해안을 통해 바다에 합류하는데다, 서해안으로 빠져나오는 강줄기 중 평야 지역을 관통하는 한강, 금강,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 등은 해마다 막대한 양의 토사를 하구에 쏟아 붓는다. 정기적으로 준설을 한다 해도 서해안 강줄기들의 하상(河床)은 뭍에서부터 거기까지 밀고나온 퇴적물들로 인해 가파른 상승을 거듭한다.

 

서해안 갯벌은 이와 같이 충적하천이 운반해온 퇴적층을 원 자양분으로 삼아 너른 유역으로 발달했고, 연안 어업의 터전이 되었다. 늘 뒤채고 바뀌는 몸… 마치 출산을 치르고 훗배를 앓다가 또 몸을 갖는 여인의 자궁처럼 서해안의 강과 바다는, 신비로운 해와 달의 주기에 맞춰 조금과 사리를 거듭하면서 몸을 푼다. 이런 점에서 서해안의 갯벌과 포구들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강이 합심해 이룩한 자연의 신비로운 조화라고 할 수 있다.

 

(사진위)해매다 겨울이면 금강 하구를 찾는 철새떼. 동진강 수로와 함께 뻗어나가는 번영로. 군산 개항 이후 한국사의 영욕이 깃든 길이다. ([email protected])

 

이와 같은 서해안 포구들의 운명을 바꾼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인간들이다. 간척과 염전 확장, 항만 건설 등으로 인하여 서해안의 해안선은 몇 번씩 고쳐 그려졌다. 남양만, 아산만, 천수만, 가로림만, 비인만, 영암만이 그렇게 사라지거나 대폭 축소되었으며, 새만금 사업으로 인해 서해안 해안선은 또 한 번 크게 수정되기 직전이다. 어깨 너머 귀동냥에 의하면, 이와 같은 간석지는 지구 탄생 이래 오염 정화, 홍수 억제 및 태풍의 피해 완화 등의 기능을 담당해왔다고 한다. 자연이 스스로 결정한 자신의 운명이 이와 같이 인간의 때를 만나, 수난을 겪는 중이다.

 

물론, 국토와 그 땅을 점유한 사람들의 생애는 함께 영고성쇠를 겪는다. 특히 비좁은(?) 한반도에 살아온 우리네는, 자신이 사는 터전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싹~ 불싸지르고 이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이를테면, 도망치고 도망쳐도 또 도망갈 곳이 사방천지였던 중국 홍군의 '대장정'이나, 하루 종일 말을 달려 깃발을 꽂은 곳까지 모든 땅을 소유했다는 신대륙 침략의 방식 '파 어웨이'는 우리 국토 위에선 언감생심, 불가능한 일이었다. 할아버지의 주검을 모셨던 방을 도배만 새로 하고 손자가 쓰는 것처럼, 한반도의 산하는 쓰고 또 고쳐 쓴 산하라고 할 수 있다. 갖은 전란 속에 다 파괴된 고향에 다시 들어가 재건을 하고 또 한 것이 우리 국토와 조상이 겪은 역사이다.

 

따라서, 한반도의 곳곳은 모두 켜켜이 역사가 쌓이고 쌓인 역사 퇴적의 땅일 수밖에 없다. 만주나 연해주 혹은 대한해협을 넘어 일본으로 탈주했다는 이야기도 이미 오랜 옛이야기… 우리는 더 비좁아진 땅 위에서 서로 땀에 결은 어깨를 맞대고, 또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야 하는 처지라고 할 수 있다. 환경운동하는 분들이 하는 말 중에 '후손들로부터 빌려 쓰는 땅'이란 말… 들을수록 묵직하다.

 

▲강경의 흥망성쇠… 논강평야와 황산벌 전투

 

(사진위)훈련병 과정을 마친 전국의 장정들이 강경역을 통해 자대배치를 받았다. (가운데)예부터 가장골이라고 불렸던 곳에 최근 조성된 계백장군 묘. (사진아래)새만금간척사업의 북쪽 경계인 비안도 풍력발전소. ([email protected])

 

부여에서 논산, 강경 그리고 익산까지 이어지는 길은 툭 터진 벌판길이다. 논산평야라고도 하고 논강평야라고도 하는 이 너른 벌판은 전적으로 금강에 의지한 미곡 산출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겐 논강평야보다 황산벌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다.

 

나당연합군과 맞선 계백의 5천 결사대가 하필이면 이 자리를 자신들의 주검을 묻을 곳으로 선택했는지, 이곳에 와 보면 절로 알게 된다. 서해와 금강과 평야가 모두 어우러진 이 지역은, 왕궁이 있던 부여의 입장에서 보면 남면(南面)의 안마당과 같은 곳. 집에 쳐들어온 도적을 마당에서 맞아 싸우다 부러진 창 끝 몇 점 핏방울로 사라질지언정, 마지막 북대(北對)의 절의를 떨쳐 보일 수밖에 없었던 군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자리가 여기 말고 또 어디가 있겠는가.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후일 부자간의 내분에 휩싸인 후백제군이 왕건의 군대와 한반도의 지배권을 둔 마지막 대치를 벌이고,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들이 다 무너지는 것을 목도한 견훤이 한 서린 눈을 감은 곳 또한 이곳이다.

 

풍요롭기 짝이 없는 이 벌판에 드리운 전란의 그림자가 영향을 준 것인지, 20세기 이후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논산은 '제2훈련소'가 있는 논산이 되었다. 오늘도 연무의 입소대대 앞에는 연인?친구와 작별 인사를 나누는 입영 장정들이 북적이고, 또 오늘 저녁 소정의 훈련 과정을 마치고 갓 이등병 계급장을 달고 출소한 '초짜 군바리'들은 강경역에서 어딘지 모를 '자대'행 기차를 기다리며 혼곤한 불안에 흔들린다.이렇게 '군사도시'의 이미지가 강하게 덧씌워진 바람에 논산은 개태사, 관촉사, 쌍계사와 같은 명승을 자랑할 기회도 적었고, 공주-부여-금마로 이어지는 '백제문화권'에서도 사실상 부수적인 위치밖에 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억울하기도 했을 것이다.

 

후백제 이후 논산의 중심 지역은 강경이었다. 조선 시대 강경은 원산과 함께 2대항이었고, 강경장은 평양, 대구장과 함께 전국 3대 장시에 들었을 만큼 강경은 조운과 물산의 중심이었다. 이미 평정되어버린 백제?후백제의 땅이 정치적?군사적 역할을 추구할 수 있었겠는가. 천혜의 자연적 조건을 적절히 활용, 강경은 새로운 상업도시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해나갔던 것이다. 극히 분주하고 소란스러움을 뜻하는 속담, '강경에 조깃배 들어왔다'는 이런 배경 하에서 나온 것이다. 요즘 식으로 하자면, 강경은 호서 지역 최대의 물류 유통 단지였던 것이다. 지금은 대부분의 관공서가 논산 신시가쪽으로 자리를 옮겨 논산경찰서 정도만이 남아 있지만, 강경의 골목 골목을 천천히 거닐다 보면 강경이 누렸던 오랜 영화의 흔적이 여전히 단단하다. 1905년에 개교했다는 강경초등학교, 여전히 우람한 한일은행 지점 자리 등도 볼만 하지만, 강경 최고의 경관은 예나 지금이나 옥녀봉에 올라야 볼 수 있다. 금강의 큰 줄기와 논강평야가 한 눈에 조망되고 뒤돌아서면 강경읍내 그 너머 황산벌이 한 눈에 들어온다.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 이곳은 요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저무는 석양 아래 감상해보시라. 자연 경관과 역사의 경관이 함께 눈에 들어온다.

 

조선 후기 최대 전성기를 누렸던 강경의 몰락(?)이 시작된 것은 1899년 더 아래쪽 금강 포구 진포가 군산항으로 개항하게 된 이후이다. 외세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인천과 부산이 한반도의 주요 항구로 새롭게 부상하고, 강경시장이 갖고 있던 물류 유통의 기능을 군산항과 이리역에 넘기면서, 이제 강경은 역시 항구의 기능이 대폭 축소된 곰소항 등과 더불어 젓갈 특산지 정도로만 알려진 곳이 되고 말았다.

 

서해안과 이 땅의 개땅쇠들이 겪은 소금 같은 세월이 젓갈이라는 음식 속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군산, 20세기 식민 근대의 살아있는 증거

 

군산은 한반도 근대화의 살아있는 증거라고 할 수 있는 도시이다. 최무선의 진포대첩 이전, 천리 금강의 맨 끝자락에 자리한 이 포구는 역사적 존재감이 미미했었다. 아마 군산열도와 육지를 이어주는 배후지 정도의 역할이 진포에 부여된 유일한 소명이었을 것이다.

 

한가롭던 어촌 마을의 운명이 급변하기 시작한 것은 외세가 물밀듯이 밀고 들어온 이후, 한반도를 강점한 일제가 인천, 군산, 목포를 서해안의 주요 항구로 개발(?)하기 시작한 이후이다. 그동안 어떤 고을이 조금 더 크고, 어떤 마을이 좀 작은지를 결정한 것이 오랜 한반도 삶의 내력이었다면, 이제 외세가 식민지 경영을 위해 한반도의 지도를 새롭게 그린 것이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 가 가장 공들여 그려놓은 것은 식민지 체제 아래에서 그 맨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한 자본주의의 모습이었다. 인간의 소유욕을 극한까지 끌어내는 자본주의의 침탈은 식민지 내에 또다른 형태의 내부 식민지를 건설하는 결과로 드러난다. 자본은 노동과 재화를 자신의 식민 영토로 삼는다. 번영로가 잘 보여주듯, 식민지 거점 도시가 된 군산은 내포, 김제만경 평야, 전국에서 몰려온 인력을 내부 식민지에 거느리며 번성하기 시작했다. 군산의 이와 같은 비극적 운명은 해방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미군의 진주와 함께 군산은 새로운 조차지를 내줘야 했고, '아메리카타운'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까지 확장되어 갔다.

 

군산 시내 곳곳에는 근대 이후 한반도와 한국사회에 불어닥친 변화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군산 곳곳에 서 있는 '근대문화유산'이란 명칭이 좀 해괴하긴 하지만, 군산은 20세기 한국 근대사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도시임에 분명하다. 백제와 후백제의 역사만 역사이겠는가. 치욕스럽다고 해서, 부정한다고 해서 역사가 새로 쓰여지는 것도 아니다. 하여, 군산이란 지명은 늘 내 마음 속에 우리 민족사에 대한 애증의 양가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단어가 되었다.

 

현재, 군산은 새만금 간척사업이 완공되었을 때, 다시 한 번 크게 번성할 것으로 기대되는 지역이다. 20세기 한반도가 당한 외침의 상징과 같은 도시, 군산이 이번에는 능동적인 간척 사업을 통해 21세기 동북아의 주요 거점으로 거듭날 기회를 맞이했다는 것… 긍정적인 의미에서, 난 우리 조국이 21세기에 돌입했다는 것을 새만금을 보면서 실감하곤 한다.

 

하지만, 용담댐 건설과 수몰민의 양산, 환경 파괴 논란과 같은 직?간접적 희생과 크기를 알 수 없는 대가를 치르고 새만금 간척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잊을 수는 없다. 우리는 이렇게 조국의 산하를 또 고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크게 고치는 일이다. 그 후과(後果)를 간척사업을 주도한 세대가 감당한다면 차라리 다행이겠으나, 새만금으로 인해 얻게 될 이득과 손실의 대부분이 후대의 몫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난 아직도 새만금 방조제를 한가롭게 둘러볼 생각이 전혀 없다.

 

여전히 군산이 현재진행형의 도시이고, 우리 민족은 한반도를 고쳐 쓰고 또 고쳐 써온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애써 상기하는 것으로, 나는 내 불안감을 달랜다.

 

/김병용(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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