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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 사리장엄, 1400년의 꿈] 1."미륵사 창건 배경 섣불리 풀어선 안돼"

지난달 14일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를 위한 해체과정에서 사리장엄이 발견되었다. ([email protected])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석탑 보수정비를 위한 해체조사 과정에서 지난달 14일 사리장엄이 발견됐다.

 

500여점에 달하는 이 사리장엄은 미륵사 창건 배경 및 발원자, 석탑 건립 시기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로, 무령왕릉 발굴과 능산리 금동대향로 조사 이래 백제지역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석탑 조성 내력을 적은 금판인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의 해석을 놓고서는 여러가지 논란이 일고 있다. 특히 '무왕의 왕비가 백제 관료의 딸'이라는 글귀로 인해 서동설화가 허구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장 최완규 교수가 "미륵사 사리장엄의 의미와 가치는 크지만, 사리봉안기가 미륵사 사찰 창건의 모든 것을 말해준 다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충분한 연구가 진행돼야 한다"는 요지의 글을 보내왔다. 최교수는 "서동설화가 허구라도 해도 그 자체로 역사성을 갖는다"며 "아름다운 꿈은 깨지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최교수의 글을 세차례에 나눠 소개한다.

 

금제사리봉안기 앞부분.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백제왕후의 발원으로 기해년(639년)에 대왕을 위해 창건' 되었음이 밝혀져 서동설화가 허구라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위). 은제관식과 금제소형판 그리고 귀걸이와 족집게. ([email protected])

 

미륵사지 석탑 해체과정에서 발견된 사리장치를 두고 '국보 중의 국보' '백제 고고학의 최대성과' '미륵사의 판도라상자가 열리다' 등 언론에서 보인 경이에 가까운 찬사는 연구자는 물론, 온 국민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석탑 금제사리봉안기의 첫 구절 '竊以(가만히 생각하건데)…'처럼 흥분을 가라앉힌 후 냉정하게 자료를 분석하고 연구하여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이 이를 다시 들춰낸 21세기 우리의 과제가 아닐까 싶다.

 

잘 알다시피, 미륵사는 가람배치의 형태나 규모, 그리고 남아 있었던 석탑 등이 가히 세계적일 뿐 아니라, 미륵사 연기설화에 보이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로맨스'는 시공을 뛰어 넘어 우리에게 아름다운 꿈을 가질 수 있게 해주었던 대서사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더하여 석탑의 중심기둥 안에서 금빛 찬란한 사리호와 사리봉안기, 구슬, 은제관식 등 500여점의 유물이 1400여년의 침묵을 깨고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으니, 금세기 고고학의 최대 성과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미륵사 석탑의 사리장엄은 1층 중심 기둥(心柱石)의 중앙에 설치된 네모난 사리공(한변 24.8cm, 깊이 27cm)에서 발견되었는데, 바닥 전면에는 두께 1cm의 판유리 1매를 깔고, 그 위에 각종 공양품 505점이 정성스레 안치되어 있었다. 공양품이 안치된 순서를 보면, 먼저 사리공의 네 모서리에 원형 합 6개를 안치한 후, 그 사이의 빈 공간을 녹색 유리구슬로 채운 뒤 남편에는 은제 관식과 금제 소형판, 그리고 북편에는 직물로 싼 손칼(刀子)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중앙에 금제 사리호를 세워 안치하고 남측 벽면에 비스듬하게 사리봉안기를 두고 있었다. 이 외에도 북측과 서측 벽면 쪽에는 부식이 심한 3∼5종의 직물들이 있었고 주위에서는 금실(金絲) 등과 함께 작은 금덩이가 발견되었다.

 

금제 사리호를 비롯한 화려한 사리장엄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역시 이들 공양품을 봉안하게 된 내력을 적은 금제사리봉안기일 것이다. 이는 미륵사 석탑을 세우면서 작성한 당시의 생생한 기록이기 때문에 후대에 작성된 그 어떠한 사료보다도 신뢰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금제사리봉안기는 가로 15.5cm, 세로 10.5cm 크기의 금판으로 앞뒷면에 한줄에 9자씩 총 194자를 새겼으며 특히 앞면에는 붉게 주칠하여 문자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하였다. 그 주요 내용을 보면 백제왕후는 당시의 최고 관직인 좌평(佐平)이었던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로서 매우 불심이 깊었는데, 이러한 왕비의 선심을 바탕으로 대왕의 안녕과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기해(639년) 정월 29일에 가람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했다는 발원문이다. 바로 이 사리봉안기의 내용이 미륵사 창건연대와 서동설화의 진위 논란에 대한 중심에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일부 언론의 기사 제목이나 일부 학자의 인터뷰를 보면, 사리봉안기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여 미륵사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백제왕후의 발원으로 기해년(639년)에 대왕을 위해 창건'되었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미륵사의 창건은 선화공주와는 무관하다', 나아가 '서동설화는 허구'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미륵사의 창건문제가 이처럼 간단하게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일까? 즉, 미륵사지 발굴조사 결과 나타난 가람배치의 특성이나 출토 유물의 성격, 그리고 「삼국유사」 무왕조에 나타난 미륵사 창건 연기설화 등을 좀 더 꼼꼼하게 분석해 본다면, 이번에 발견된 사리봉안기의 내용이 미륵사의 창건에 대한 모든 정답이 될 수는 없다.

 

/최완규(원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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