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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기억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

유종호 '그 겨울 그리고 가을 - 나의 1951년' 출간

우리 문학 평단의 큰 어른 격인 유종호(73) 씨가 10대에 경험한 6ㆍ25 전쟁의 풍경을 생생하게 담아낸 에세이 '그 겨울 그리고 가을 - 나의 1951년'(현대문학 펴냄)을 출간했다.

 

1941-1949년의 유년시절 체험을 담은 2004년작 '나의 해방 전후'에 이어 격동의 현대사를 기록한 유씨의 두 번째 회상에세이로, 지난해 월간 '현대문학'에 연재됐던 것이다.

 

이 책에는 당시 열일곱 살이던 저자가 "엄동설한에 광목천의 배낭 하나를 달랑 메고" 떠났던 피란길부터 시작해 곤궁한 피란생활, 청주와 원주에서의 미군부대 생활과 다시 충주의 학교로 돌아오기까지의 이야기가 한 편의 역사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반세기나 지난 일이지만 대부분 "충격적인 첫 경험"이었던 탓에 저자는 아주 세세한 것까지 그대로 되살려냈다. 현대사를 몸소 체험한 석학의 기록은 "기억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저자의 말을 되새길 때 더욱 큰 울림을 준다.

 

"많이 기억하는 쪽이 약자이며 강자는 결코 기억하지 않는다는 깨우침이 섬광처럼 머리를 스쳤다. 많은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많이 상처 받았다는 것이고 많이 아팠다는 것이다. (중략) 기억은 상처 입은 자존심이고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내적 독백이다"(116쪽)

 

미군부대에서 받은 '새경'을 고스란히 생활비로 써야했던 처지에도 서정주의 시가 실린 시집을 큰마음 먹고 사고, 스스로도 시를 '끼적이던' 유씨의 모습에서는 물질적인 갈증보다도 절실했던 문화적인 갈증도 엿볼 수 있다.

 

"배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는데 무슨 청승을 떨고 있는냐, 그런 걸 끼적거릴 생각이 나느냐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배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고 막막하기만 하기 때문에 이런 낙서도 해본 것이다. '시가 시를 낳고 소설이 소설을 낳는다. 좋은 시가 좋은 시를 낳고 나쁜 시가 나쁜 시를 낳는다.'"(98쪽)

 

역사의 격랑 속에서 너나할 것 없이 겪은 일이긴 하지만 어려웠던 시절의 개인사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소설의 형식을 빌려 짐짓 다른 이의 이야기인 것처럼 위장할 수도 있었겠지만 저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 또한 한 시대의 진상에 육박하는 길"이라는 생각에 진솔한 에세이로 풀어냈다고 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지배당하고 번롱 당하기만 했던 시절을 이제 내 쪽에서 지배하고 있는 듯한 환각이 주는 쾌감을 이 책을 쓰면서 맛보았다"며 "타자에게 떠밀리고 휘둘리기만 했으나 이제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흐뭇하고 유쾌하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356쪽. 1만5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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