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를 비롯해 세계 각국은 후대에 보존할 가치가 있는 윗세대의 문화적 소산을 대개 '문화유산(Cultural Heritage)'으로 부른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일본과 한국만 '문화재(Cultural Properties)'란 말을 선호한다. 문화재는 법적 제도적인 재산권 내지 소유권을 강조하는 뉘앙스를 풍긴다. 또한 '재(財)'에는 문화를 단지 재화로 취급하는 물질주의와 관료주의적 사고방식이 담겨있다.
이 단어에는 아시아 각지의 문화유산을 가져다가 국가재산으로 삼은 일본 군국주의 시대의 욕망이 은폐돼 있다. 한편 우리나라는 일본에서 문화유산 관리 체계와 방식을 죄다 베껴왔고, '문화재'란 용어 역시 그대로 가져왔다. 그 와중에서 문화에 대한 물질주의와 관료주의를 답습했지만, 다양한 문화유산을 자기의 문화적 재산으로 삼고 이를 '활용'하는 재능은 거의 익히지 못한 듯하다.
최근 도내 한 국회의원의 주도로 문화재보호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발의되었다. 법안의 제안 이유는 이렇다. "문화재는 역사적·문화적으로 민족의 긍지와 정통성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데, "근대문화재 보존이라는 명목"으로 "침탈국인 일제의 문물을 문화재로 인정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적 긍지와 자존심을 훼손"하므로 이를 "문화재로 지정 또는 등록할 수 없도록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따져보자. 문화재는 과연 반드시 "역사적·문화적으로 민족의 긍지와 정통성을 표현"해야만 하는가? 어떤 개론서나 국제협약, 심지어 백과사전에서조차 '문화재'를 이렇게 정의하지는 않는다. 만약 '문화재'가 이렇게 정의된다면, 세계3대박물관(루브르박물관,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대영박물관)의 엄청난 인류문화사 자료들이 문화재 물목에서 사라져야 할 것이다. 박물관의 문화재들은 이집트와 아시아의 찬란한 고대문명을 증명한다. 그런데 같은 시대에 프랑스와 영국은 거의 야만상태에 있었고, 앵글로색슨의 미국은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니 "민족적 긍지와 정통성을 표현"하기는커녕, 도리어 자국 문화의 낙후성을 입증하는 문물들을 문화재로 끌어안고 있는 프랑스와 미국과 영국의 저 박물관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중략)중국 북경의 원명원(圓明園)은 청나라 최고의 황실정원이었다. 하지만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때 영불연합군의 침략으로 폐허가 됐다. 이후 중국은 한 세기 반이 다 되도록 그 폐허를 문화유산으로 보존해 왔다. 자국민들에게는 '치욕의 역사'를 상기하는 교육현장으로, 서구인들에게는 제국주주의 시대의 '야만의 역사'를 일깨우는 야유의 현장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이처럼 치욕의 유산을 보존한다고 민족의 긍지와 정통성이 훼손되는 게 아니다. 아픈 기억을 무조건 배제하는 것이 오히려 과거를 주체적으로 소화하지 못하는 콤플렉스와 무능의 반증이 될 수 있다. 관건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활용'하는가에 달렸다. 그리고 지금 군산에서도 일제시기의 유산을 새롭게 '해석'하고 '활용'하려는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런 마당에 그것을 지역의, 더 나아가 국가의 '문화적 재산' 물목에서 제외하자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마지막으로, 일제 강점기에 이 땅에 건립된 근대유산을 '일제의 문물'로만 보는 시각에 동의할 수 없다. 비록 당시에 일인들이 도시와 건물을 설계하고 주인으로 행세했지만, 정작 그 도시를 일으키고 산업현장에서 피땀 흘린 이들은 이 땅의 민중이었다. 군산의 세관창고와 조선은행, 나가사키18은행이 어찌 일제 통치자와 친일파의 영화만을 기억하겠는가? 건물 벽돌 한 장 한 장마다 또한 수탈과 압박의 시대를 건너온 조선 민초들의 눈물과 애환, 그리고 끈질긴 생명력의 사연들이 깃들어 있을 터이다. 이런 사연에 눈감고 일제시기의 유산들을 단지 '일제의 문물'로만 본다면, 이야말로 엘리트주의 관점에서 역사를 읽는 편협한 해석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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