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에 진행되는 '전주재발견 우리땅밟기' 현장답사 주제는 '전주에 뿌려진 천주교인의 성혈'이다. 초남리·숲정이·서천교·초록바위를 거쳐 풍남문과 전동성당에 이르는 코스다. 답사 중 신앙의 본보기가 되는 윤지충(바오로) 권상연(야고버) 유항검(아우구스티노) 유중철(요한) 이순이(누갈다) 동정부부 등의 순교자들을 두루 만나볼 수 있는 의미있는 코스이다.
초남리는 전라도의 사도로 유명한 유항검이 교우촌을 이루어 살았던 마을이다. 전라도 사람으로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맨 처음 들은 사람은 진산에 살고 있던 윤지충이었지만, 복음을 맨 처음 받아들인 사람은 유항검이었다. 이종사촌인 윤지충으로부터 천주교에 대한 소식을 전해들은 유항검은 당시 사회의 모순을 극복할 복음으로 여기고 1784년 늦가을에 스스로 양근의 권철신 집을 찾아가서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우고 그를 대부로 삼아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초남리로 돌아왔다. 그는 자기 가족·친척·친지·노비 등에게 복음을 전해 초남리를 교우촌으로 만들었고, 여러 고을에 산재해 있는 전답의 소작인과 마름에게도 전교해 복음을 전라도 각지로 전파시켰다. 10여 개 고을에 줄잡아 15,000마지기(9,900,000㎡)나 되는 막대한 전답을 소유한 그가 재산을 덜어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면서 전교를 하자 사람들이 대거 입교, 전주·금구·김제·영광 등에까지도 천주교가 전해졌다.
전라도의 복음 전파는 윤지충에 의해서도 널리 이뤄졌다. 그는 1784년 겨울에 서울 명례방 김범우 집에 들러 정약전에게 천주교 서적인 「천주실의」와 「칠극」을 빌려다가 3년 동안 공부한 뒤 부족한 교리를 정약전에게 배우고 그를 대부로 삼아 1787년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어머니와 고종사촌 형인 권상연 등 가족과 친척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무장의 최여겸(마티아), 고산의 양언주, 무안의 고시윤 등에게도 교리를 가르쳤다.
이승훈에 의해 신부로 임명돼 견진성사와 미사성제까지 집전하던 유항검은 풍부한 교리지식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성사집전이 독성죄에 해당된다는 것을 깨닫고 즉시 이를 중지하고 북경교회에 밀사를 파견해 선교사들의 지시를 받도록 촉구했다. 그의 요청으로 1789년과 1790년에 윤유일을 연거푸 북경에 밀사로 파견해 구베아 주교의 지시를 받고 성직자 영입 운동을 추진했다. 이 때 유항검은 밀사를 파견하는 데 드는 비용을 지원했다. 그는 필요할 때마다 항상 교회를 위해 돈을 선뜻 내놓았다. 1795년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의 사택 구입비로 300냥을 내놓았고, 1796년에 주문모 신부의 지시로 전라도 신앙공동체가 선교사 영입을 추진할 때도 밀사 파견에 필요한 경비 400냥을 후원했는데, 전라도 신앙공동체는 이 일을 1800년까지 추진했다.
전주는 첫 순교자를 배출한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조선교회가 1790년에 밀사로 파견된 윤유일을 통해 유교식 조상제사에 대한 고민을 묻자 구베아 주교는 조상제사를 미신으로 규정해 금지하는 사목교서를 내렸다. 이 지시에 따라 전라도교회의 지도자들인 유항검·윤지충·권상연 등은 즉시 조상들의 신주를 묘 옆에 묻거나 소각하고 유교식 제사의례를 거부했다. 이 일은 곧 유생들에 의해 패륜적 행위로 규탄을 받아 두 사람은 체포됐고 전주감영에서 심문을 받았다. 두 사람은 천주교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음식을 차려놓지 않고 신주를 모시지 않은 것은 정당하다고 논리적으로 반박했지만, 결국 사형 판결을 받고 1791년 11월 13일 남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그들의 머리는 5일 동안 장대 끝에 높이 매달려 전시됐다.
전라도교회는 1801년 신유박해로 다시 큰 피해를 입었다.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사망하자 노론 벽파는 정조의 개혁정치를 주도했던 천주교와 연결된 남인 시파를 제거하기 위해 1801년 1월부터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대대적으로 단행했으며, 그 여파가 전라도에도 미쳤다. 전라감사 김달순은 좌·우 포도청에서 보내준 자료를 토대로 3월에 신자들을 수색해 200여 명에 이르는 많은 신자들을 여러 고을에서 체포했다. 현존하는 기록에 의하면, 그들 중 20명은 처형당했고 42명은 유배를 당했다. 처형된 20명 중 유항검·윤지헌 등 지도층 신자 5명은 1796년부터 추진해 왔던 선교사 영입운동(大舶請來사건)과 무력을 이용해 개교하려 했던 일이 탄로나 사형 판결을 받고, 1801년 9월 17일 전주 남문 밖에서 처형당했다. 이 때 유항검의 목은 풍남문 누각에 매달아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갖게 했으며, 그의 재산은 모두 몰수되고 그가 살던 집은 헐려 연못으로 만들어졌다. 이처럼 윤지충·유항검 등이 순교한 남문 밖 순교터에는 1915년에 전동성당이 건립되었고, 유항검이 살던 집터는 현재 사적지로 가꾸어졌다.
아울러 전주 감옥에서는 유중철이 교수형을 당해 순교했고, 숲정이에서는 유항검의 가족들인 신희·이육희·이순이·유중성(마태오) 등이 참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이들 중 관심을 끄는 순교자는 다블뤼 주교가 '한국 순교자들의 보석'이라고 표현했던 이순이·유중철 동정부부이다. 1795년에 주문모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 성체를 영한 두 사람은 각자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지키기 위해 동정생활을 결심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주문모 신부는 두 젊은이의 동정성소를 보호해 주고자 중매를 하여 1797년에 9월 혼인식을 올렸고, 이듬 해 10월에 전주 초남리 부모 앞에서 동정서약을 했다. 두 사람은 1800년 12월에 몇 차례 육체적 욕정의 유혹을 받았으나 기도로 끝내 이겨내고 남매처럼 살았다고 한다.
이처럼 전라도 교회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윤지충·유항검·이순이 등 신앙의 본보기가 되는 순교자들을 대거 배출했다. 이에 따라 현재 추진하고 있는 시복시성 대상자 124위 명단에 병인박해 이전에 전라도에서 순교한 24명의 고귀한 순교자들이 이름을 올리고 있고, 그 중에서도 윤지충이 124위의 대표 순교자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서종태(호남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 이번 답사는 '전주에 뿌려진 천주교인의 성혈'
(안내 서종태 호남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11일 오후 2시 전주역사박물관 출발
초남리(유항검 생가터·교리당)→숲정이성지(이순이 루갈다 순교터)→서천교→초록바위→전동성당
※ 다음 답사는 25일 '소리따라 길따라-동편소리의 또다른 맥, 고창 소리를 찾아'(안내 유장영 전북도립국악원 관현악단장)
※ 답사신청은 전주문화사랑회(www.okjeonj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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