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을 진학하게 되면서 거의 십년 가까이를 전주 부근에서 살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 근처에서 보냈기 때문에 버스 노선이며 전주의 지리를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곳은 극히 한정되어 있는데, 그곳조차도 갈 때마다 헷갈릴 때가 많다. 밖에 나갈 때면 다른 사람 뒤를 졸졸 뒤따르거나 전북대 앞과 객사 근처만 다녀오고는 한다. 말하자면 제한된 영역에서 살고 있는 것이고 문화의 혜택도 제한된 영역에서만 받고 있는 것이라 전주시민이 된 지금까지도 전주시민으로서의 자격이 부족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전주 시내에 나가면 가끔 들리는 곳이 있는데, '빈센트'라는 카페다. 좁은 골목 안쪽, 그것도 지하에 자리 잡고 있어 잘 눈에 띄지도 않는 그곳은 카페 내부도 요즘 카페와는 달리 허름하기 짝이 없다. 좁은 계단을 타고 내려가면 지하 특유의 냄새가 코끝에서 맴돈다. 인테리어도 요즘 카페와는 다르다. 사실 인테리어라고 할 것도 없다. 오래 된 테이블과 의자 몇 개가 인생 다 살았다는 듯 주저앉아 있고, 정체불명의 소지품들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으며 낡은 책장에는 그보다 더 낡은 책들이 가득 꽂혀 있다.
여자 친구가 고교시절부터 들렸다고 하니, 그저 오래된 곳이겠거니 하며 들락거렸던 그곳을 다시 보게 된 것은 카페에 앉아 요절한 시인 기형도의 산문집을 보고나서 부터다. 기형도의 산문집을 보면 그가 전주에 다녀갔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국일관 백반집과 신라당 제과점 등 전주에 왔을 때, 다녀간 곳을 짤막하게 써두는데, '빈센트'라는 카페도 그곳 중에 하나다. 그가 묘사하고 있는 카페 내부와 현재의 내부가 별반 다를 게 없으니 주인장은 지독한 고집불통이거나 진정 멋을 아는 사람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얼마 전에 후배들이 재밌는 문학기행을 한다하여 함께 그곳에 들렸다. 내 또래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주방에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저 아르바이트생이겠거니 했는데, 그 젊은 남자가 그곳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기형도를 알고 찾아온 우리는 그에게 공짜 차를 얻어 마시고 젊은 주인과 수다를 떨었다. 그는 현재 농사를 짓고 있으며, 대학에서는 정치 외교를 전공하고 있으며, 카페의 전 주인과 인연이 아주 긴 사람이었다. 참 독특한 이력을 가진 젊은 주인은 옛날을 추억했다. 이 지하 카페로 학생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도망쳐오곤 했었다고, 문인들이나 화가들이 들리기도 했고, 그분들에게는 아지트나 다름없었다고 옛날을 추억하는 젊은 주인은 그분들을 다시 불러오고 싶다고 했다.
나는 전주가 가진 문화의 힘이 이런 고집불통의 주인장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유럽에 가면 유명 문인들, 철학자들이 즐겨 찾던 카페가 아직 남아 있다.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닌 의자와 테이블에도 역사성을 담아낸다. 전주 한 낡은 카페의 주인장은 누가 알든 말든 삼십 년 동안의 역사를 구식 의자에 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젊은 주인이 그곳을 맡았다. 삼십 년의 문화와 역사까지 인수 받은 그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문인들의 생가복원과 문학관 건립도 좋지만 나는 '빈센트'말고 다른 곳을 더 알고 싶다. 시인들이 자주 찾던 곳, 시간의 때가 덕지덕지 묻어 있고 참을성 깊고 고집불통 주인장이 있는 그런 곳을 더 알고 싶다. 지금 전주에는 그런 곳이 될 가능성을 품은 곳이 많다. 전주시가 문화의 도시로 더더욱 발전하게 할 가능성을 품은 자리들이 골목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 곳을 경제의 논리로 평가하기에는 이제까지 다녀갔을 예술가들의 엉덩이가 참으로 아까운 것이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문화의 힘은 여러 곳에서 나온다. 음악, 문학, 건축물, 문화유산 등 문화의 힘을 가진 것들은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 냄새 속에서 나온다. 음악이 연주되는 골목, 책을 읽는 카페, 연탄재가 깨져 있는 언덕길 같은 것들에 역사와 의미를 부여할 때 문화는 괴력을 제대로 발휘하게 된다. 문화의 힘이 경제적 논리를 이겨내는 나라가 될 때, 새로운 천년이 꽃피게 될 것이다.
/백상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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