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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녕의 인문학 에세이] 도적은 도적일 뿐이다, 다만…

'임꺽정' 해석의 미스테리

대한(大寒) 추위 속에서도 봄은 슬며시 기어오고 있었다. 이제 입춘(立春)이 지났으니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다. 경기전 뒷길에 위치한 한국고전문화연구원에서 매달 하는 '봄' 세미나도 1년을 맞았다. 인연이 닿는 분들, 길(吉)한 경인년(庚寅年)이 되었으면 좋겠다.

 

▲ 벽초가 보여주는 조선의 진경

 

나에겐 봄이면 떠오르는 여자가 있다. 왜 그런지는 정확히 모른다. 그 여자가 봄처럼 느껴지기 때문일까? 그 여자는 봉단이다. 옛 애인이 아니다.

 

벽초 홍명희 선생의 소설 「임꺽정」은 '봉단편'으로 시작된다. 그 1권 봉단편의 주인공이 봉단이다. 2권은 봉단이의 작은아버지인 양주팔, 즉 갖바치(뒤의 병해대사)를 주인공으로 한 '피장편'이다. 실제로 「임꺽정」에서 임꺽정은 2권이나 되어야 조금 나온다. 그래서 불만인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1~3권이야 말로 벽초의 진면목이 유감없이 드러나는 「임꺽정」의 진수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까지 본 시대사 중에서 벽초의 서술이 가장 정확했다. 그래서 조선전기사를 강의할 때도 학생들에게 이 1~3권을 읽고 제출하라는 레포트를 내주기도 했다.

 

대략 연산군 때부터 중종, 인종, 명종 때까지의 상황을 「임꺽정」은 보여주는데, 벽초가 「조선실록」을 읽고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임꺽정」 집필 당시 조선실록이 총독부에서 간행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실록을 보았더라도, 오히려 최근 연구자들이 벽초만한 안목으로 서술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부친 홍범식이 1910년 합방 때 자결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조선 문명에 푹 몸을 담았던 벽초의 벽을 넘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또 여기에는 벽초, 육당(六堂·최남선)과 함께 식민지 조선의 3대 천재라고 불린 이광수가 따르지 못할 도저한 수준이 있다. 근대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이광수에게는 조선의 진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 이장곤과 봄 같은 여자 봉단이

 

이장곤은 홍문관 교리를 하던 촉망 받는 학자관료였다. 소설에 따르면 연산군이 죽은 어미 폐비 윤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장곤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이장곤은 덕을 쌓으라고 대답했고, 그 길로 연산군은 그를 거제로 귀양 보냈다.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선실록」을 보아도 이장곤은 이때 벌어진 갑자사화(1504년·연산군 10년) 당시 교리로 있다가 귀양간 것으로 되어 있어, 홍명희의 서술이 매우 정확한 사실에 입각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연산군은 무예도 뛰어났던 이장곤이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그를 서울로 불러 처형하려고 했는데, 이장곤은 이를 알고 귀양지에서 도망쳤다. 소설에서는 한림(翰林·사관) 정희량(鄭希良)이 여차하면 도망치라는 점괘를 주었고, 그래서 이장곤이 도망친 것으로 되어 있다.

 

아무튼 이장곤은 함경도로 신분을 숨기고 도망쳤다가 거기서 봉단이를 만나 혼인한다. 그때 그는 김서방이라고 불렸다. 봉단이는 함경도 고리백정 양주삼의 딸이고, 임꺽정의 아버지인 돌이의 사촌누이이다. 그러니까 임꺽정의 당고모인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고사, 즉 우물가에서 물을 청했더니 바가지에 버들을 띄워주었다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봉단이다. 봉단이의 매력은 <로마의 휴일> 에 나온 오드리 헵번, <어린 신부> 에 나온 문근영을 합쳐놓은 듯하다. 지혜롭고 사랑스러운 모습이 가끔은 아내 같기도 하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난 뒤 이장곤은 다시 촉망받는 관료로 복귀했다. 이별을 걱정하는 봉단이에게 이장곤은 말한다. "그대를 버리고 나 혼자 누릴 생각은 없소. 저기 하늘이 내려다보시오." 중종은 봉단이를 정경부인으로 인정한다. 어떤 분은, 이장곤 참 맘에 든다고 한다. 심정(沈貞), 남곤(南袞) 같은 간신들이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趙光祖) 등을 죽인 뒤 이장곤도 낙향하였는데, 중종이 보호해주어 그나마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 꺽정이에 대한 이상한 해석

 

「임꺽정」은 미완의 소설이다. 임형택 교수는 「임꺽정」의 후속 전개를 두고, "농민 저항의 지도자 임꺽정이 봉건체제에 대항해서 싸우다가 마침내 꺾이어 가는 과정, 그의 좌절과 죽음이 남은 이야기인 것이다"라고 예상했다. 그는 「임꺽정」을 '봉건체제에 대항한 농민 저항'으로 보는 셈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아니, 동의는커녕 이 분이 정말 「임꺽정」을 읽고 썼을까, 의심이 갔다. 그런데 오해의 원인은 벽초 자신이 제공했다.

 

벽초는 「임꺽정」에 대해, "임꺽정이란 옛날 봉건사회에서 가장 학대받던 백정 계급의 한 인물이 아니었습니까? 그가 가슴에 차 넘치는 계급적 해방의 불길을 품고 그때 사회에 대하여 반기를 든 것만 하여도 얼마나 장한 쾌거였습니까? 더구나 그는 싸우는 방법을 잘 알았습니다. 그것은 자기 혼자가 진두에 나선 것이 아니고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백정의 단합을 먼저 꾀하였던 것입니다" 라고 썼다.

 

조선이 '봉건' 사회가 아니었다는 얘기는 접어두자. 도대체 언제 임꺽정이 '백정의 단합'을 먼저 꾀했다는 말인가? 꺽정이 패거리 중에 백정은 꺽정이 하나 아니었나? 출신성분이 다 달랐지 않았나? 정말 「임꺽정」을 벽초가 쓴 거 맞나, 하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임꺽정은 싸움도 '단합'하기보다는 일대일 맞장 뜨기나 몇몇 두령(頭領·여러 사람을 거느리는 우두머리) 중심의 전투를 즐겼다. 산채를 옮기면서 먼저 살던 사람들 수십 명을 마구 죽였고, 도우러 왔던 도적 우두머리도 때려 죽였다. 이런 일이 예사다. 그는 마음대로 했다. 그리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가공할 힘과 검술이 있었을 뿐이다.

 

최근 「임꺽정」을 새롭게 해석한 고미숙 선생조차 어떤 인터뷰에서, "삶의 간극이 없는 곽오주가 제일 끌린다"고 했다. 이상하다. 곽오주, 쇠도리깨를 쓰는 도적으로 임꺽정의 두령인데, 자기자식을 죽인 트라우마로 우는 애들만 보면 정신이 나가서 쇠도리깨로 애들을 때려죽인다. 저 하나 삶의 간극이 없는 것은 좋지만, 죽은 애들은 어찌되나?

 

▲ 「임꺽정」의 희망

 

이렇듯이 「임꺽정」을 둘러싼 해석에는 '오버'가 있다. 소설이라 그런가? 「임꺽정」의 메시지는, '봉건 철폐' 같은 그런 거창한 이상이 아니라, 오히려 나중에 벽초가 밝힌 대로, '조선 정조(朝鮮情調)에 일관된 작품'이 아니었을까? 굳이 그림을 그리자면, 백정은 백정대로 스트레스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 정도, 그리고 조선 사람들의 살과 피가 느껴지는 이야기를 벽초는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명리학에 능통한 도인 갖바치는 백정이었음에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士林)들과 깊은 교류를 갖는다. 조광조의 귀양길에 동대문 밖 어느 민가에서 먼발치로 조광조를 보내는 장면은 가슴을 내주는 인간들의 아픈 정감을 보여준다. 벽초는 그런 걸 아는 감수성이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임꺽정」을 통해 그런 인간들의 관계가 좌절되었던 시대, 연산군-명종대를 그려냈을 것이다. 그러면서 수많은 꺽정이가 도적이 되지 않고도 자기 팔자대로 살 수 있는 길이 열려있는 세상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오항녕(전북일보 문화전문객원기자·한국고전문화연구원·수유너머 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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