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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표의 전북 작고 문인을 찾아서] ④전북시단의 개척자 유엽(1)

한국 최고 시전문지 '금성' 발간…문학계 후진양성에도 혼신의 힘

유엽(柳葉·1902~1975)은 전주 출신의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언론인이자 학자이며 승려였다. 그의 본명은 춘섭(春燮)이고, 호는 화봉(華峰)이다. 그는 전주 신흥학교를 졸업한 후에 일본 와세다 대학 문과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유학중이던 1921년 김우진, 최승일 등과 극예술협회를 조직하여 연극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이해 7월 여름방학을 맞아 전국을 순회하며 상연한 조명희 원작 「김영일의 사」에서 주연을 맡았다. 그는 한국연극사의 초두를 장식한 인물이며, 동시에 전라북도 연극운동의 창시자인 셈이다. 그의 동생 유춘이 전라북도 연극 발전에 이바지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엽이 한국문학사에 남긴 업적은 그뿐이 아니다. 그는 1923년 11월 한국 최초의 시전문지 「금성」을 발간하였다. 동인은 양주동과 손진태, 백기만 등이었다. 그는 발간에 소요되는 경비를 조달하고 편집하는 등 이 잡지를 주도하였다. 지금까지 한국 시사에서 양주동이 주재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유엽은 이 잡지의 창간호의 발행인 겸 편집인이었고, 2호의 편집인이었다. 그는 3호의 편집을 마무리하고 출판사에 넘길 무렵 부친상을 당하여 양주동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전주로 내려왔다. 그 탓에 편집인으로 자신의 이름을 올린 양주동은 출판되자마자 일본으로 건너가 버렸다. 졸지에 「금성」의 편집인이 바뀌고 발행마저 중지된 것이다. 이런 줄 모르고 3년상을 마치고 가산을 정리하여 상경한 유엽은 망연하였고, 그 뒤로 소설 창작에 나섰다. 창간 후에 「금성」의 발행인은 이익상의 일본인 부인이 맡았는데, 그것은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통과하기 위한 조치였다.

 

한국문학사에서 유엽의 공적이 길이 기억되어야 할 세 번째 이유는 최초의 서사시 '소녀의 죽음'(「금성」, 1924. 1)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그 동안 최초작으로 거론되었던 김동환의 「국경의 밤」(1925)보다 앞선 것이다. 요새 들어 김동환의 작품에 나타난 서사성의 부족을 지적하는 연구자들이 늘어나고 있어서 유엽의 작품이 학계에서 공인될 날이 멀지 않다.

 

네 번째로 그가 문학계에 남긴 공은 후진의 양성이다. 일찍이 「금성」을 통해 김동환을 발굴한 유엽은 일제 말기 해인사에 머물면서 많은 시인과 소설가를 길렀다. 그의 문하에서 나온 대표적인 작가는 시인 허민, 소설가 최인욱 등이다. 그는 「문장」 등에 이들을 데뷔시키고 문단 활동을 주선해주었다. 이 무렵 해인사에서 연이어 신춘문예에 다수 입상한 것은 온전히 그의 덕분이다. 다섯 번째로 유엽은 고향의 후배 작가들에게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신흥학교 후배 시인 김해강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낸 것을 비롯하여 시인 김창술의 작품을 「금성」에 실어주었다. 유엽은 한국의 근대시단을 개척한 선구자답게 전라북도의 시단을 형성하는 일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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