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이 가까운 일본인 친구는 그날 신쥬쿠의 고층빌딩에서 지진을 만났다고 했다. 정전으로 엘리베이터가 서 버리는 바람에 친구는 45층을 걸어서 내려와야 했고, 교통편이 사라진 암흑의 거리를 다시 4시간 동안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책꽂이가 모두 넘어지면서 아수라장이 된 집으로 돌아온 그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를 나는 더 묻지 못했다.
9·11테러에 빗대어 일본인 스스로 '3·11 쇼크'라고 하는 일본 동북부의 대재앙으로부터 한 달여, 그 하루하루는 우리에게 많은 겸허함을 가르쳤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무력했던가. 그러나 일본인이 겪어내고 있는 참담함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느껴야 했던 것은 다만 절망과 무력감만은 아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재해의 현장을 지켜보면서 오히려 '인류의 진화'를 말하는 희망의 목소리였다. 영국의 한 일간지는 제목으로 '간바레 닙폰(힘내라 일본)'을 뽑으며 일본을 격려하는 인류애를 보여주었다. 대혼란 속에서 폭동도 약탈도 없이 보여준 인본인의 자제력과 침착한 대응은 일본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 모습들은 인류가 지향해야 할 어떤 가치와 유형을 보여주는 감동으로 세계 속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지난 세기 인류가 한결같이 추구했던 가치는 모더니즘의 가치들이었다. 19세기의 구습에서 벗어나 문명과 보편성을 인류가 공유하자면서 시작된 모더니즘은 능률의 극대화를 미덕으로 펄럭이며 도시화·기계화를 통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이룩해 냈다. 물질을 가치의 척도로 생각하는 생활의 편의와 그것을 통한 행복에의 추구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의 근대화도 다르지 않았다. 서구화가 바로 현대화라는 물결 속에서 지역문화나 고유문화는 터부시될 수밖에 없었다. 모더니즘의 가치와 미덕 속에서 흙벽의 초가집은 척결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해서 과거의 삶과 도식은 비판과 심문의 대상이 되었고 현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조금 더 우회의 길을 걸었다. 우리가 상정하고 있던 여러 발전모델 가운데는 '일본처럼'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이미 일본이 하지 않았는가. 일본이 했지만 아무 문제도 없었다는 전제를 깔고 우리는 얼마나 일본의 발전모델들을 따라잡기에 허둥댔던가.
그러나 지금 일본의 대재앙은 모더니즘이 지향해온 모든 가치에 대하여 다시 한 번 통렬하게 성찰의 말을 건네고 있다. 어디 그것뿐인가. 불행하게도 거기에는 인류의 진화를 보여주었다고 믿었던 일본의 초라한 실상도 있다.
잘못하다간 일본이 침몰해 버릴 수도 있다는 우려가 일본인 자신에게서 나오고 있다. 국가를 이끌어갈 주체적인 동력을 잃은 정치권에 대한 탄식만이 아니다. 너무나도 재건의 움직임이 지지부진하니 무엇을 하건 움직여야 한다는 의견이 곳곳에서 보인다. 심지어 소비를 부추기면서 '외식도 좋고 충동구매도 좋다. 차라리 사재기라도 하자'고 외치는 신문칼럼마저 보인다.
그 가운데는 동물원 공짜관람도 있다. 그 동안 문을 닫고 있던 우에노 동물원을 비롯한 네 개 동물원이 4월 1일부터 다시 문을 열면서 '지진 피해자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무료입장을 시키겠다고 발표했다. '나 지진피해자요' 하면서 동물원에 들어와 공짜로 호랑이 구경이라도 하라는 말인데, 저 대재앙 속에서 이런 발상이 어떻게 가능한 건지 모르겠다.
석탄이나 기름 같이 자연으로부터 얻어낸 에너지가 고갈되면서 그 대체수단으로 부상한 것이 원자력이다. 그러나 원전이 안전성에 있어서 결코 그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자성을 일깨우고 있는 지금, 한국에서는 '삼척 핵발전소 백지화'와 같은 원전유치를 둘러싼 갈등이 일고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뜨린 원자탄을 개발하며 '맨하탄 프로젝트'를 지휘했던 오펜하이머 박사는 '원자탄은 평화와 악마의 두 얼굴을 가졌다.'고 했다.
이웃의 불행에서 찾아야 하는 교훈들은 더 가슴 아프다. 그러나 반면교사로서, 일본의 재앙으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은 쓰나미처럼 많다.
/ 한수산(소설가·세종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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