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학교 가까이에 있는 식당에서였다. 옆자리에서 돈가스를 먹고 있던 여고생 가운데 하나가 킬킬거리며 소리쳤다. '와, 완전 개맛이다.' 음식을 놓고 개맛이라니. 맛이 없어도 너무 없다, 이건 도저히 못 먹겠다, 그런 소리쯤으로 알아듣고 고개를 돌려보니, 개맛이라고 외친 여학생은 황홀하다는 듯 입맛을 다시고 있는 게 아닌가.
요즈음 청소년들 사이에서 개라는 말이 일으키고 있는 이변의 하나다. 이들이 쓰는 은어(隱語) '개맛'을 '개 같은 맛' '못 먹을 맛' 정도로 알아들어서는 안 된다. 그 반대다. 정말 너무 맛있을 때 내지르게 되는 탄성의 하나가 '개맛'이기 때문이다.
은어가 만들어지는 원칙에는 기존 어휘를 대치, 첨가, 삭제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저 옛날 군대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골병들기 십상이라는 뜻에서 공병대를 '골병대'라고 불렀던 것은 대치된 것이고, 이마빡을 '마빡'이라고 하는 것은 삭제의 경우가 된다. 그 가운데는 순서를 바꾸는 치환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도 있다. 가짜를 '짜가'라고 하는 게 그것이다.
이렇듯 은어는 그 형성부터가 구성원이나 또래집단 이외에는 알아들을 수 없도록 그들만의 강한 유대감을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이해를 같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특수한 언어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은어는 자기들만의 깊은 소속감 속에 비밀을 유지하고 친밀감을 더하는 효과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개맛'의 경우는 특이하다. 통상 우리말에서 개라는 접두사가 붙으면 그 원형보다 질이 떨어지거나 열등하다는 뜻이 된다. 복숭아는 좋은 과일이지만 개복숭아는 먹어 볼 것도 없는 과일이다. '개 싸대듯' 한다고 하면 쓸데없이 함부로 쏘다니는 게 되고, 사람 알기를 '개 콧구멍으로 안다'고 하면 사람대접을 못 받는 경우다. 어디 그뿐인가. '개고생'이라고 하면 고생의 정도가 극심한 경우이고, 사람을 함부로 치고 때릴 때 '개 패듯'하거나 '개 잡듯'한다고 한다.
이렇듯 개라는 접사가 붙으면 상황은 나쁜 쪽으로 돌변한다. 그런데 바로 이 개가 놀랍게도 청소년들 사이에서 전연 다른 의미로, 그것도 최악에서 지고지선의 최고로 변해 버린 것이다. '개'라는 말의 화려한 비상이 아닐 수 없다.
언어는 살아 있는 것이다. 생성소멸을 거듭하며 동시대의 정서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인위적인 강압으로 통제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는 해도 '개'의 경우는 특이하다. 은어의 어떤 발생 배경과도 다른 기이한 현상을 보여준다. 의식의 전도랄까, 언어의 의미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의미의 도치까지 와 닿은 이 언어파괴의 극단적인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대학가에서 학생들 사이에 쓰이는 은어도 만만치 않다. 다만 그 생성과 소멸의 주기가 한결 빨라져 가고 있다. 소위 일류대학을 두고 '스카이(SKY)'라고 하던 것도 그렇다. 서울대·고려대·연세대를 지칭하던 이 말은 어느 새 사라졌다. 다만 여전히 신학기가 되면 동아리 회원을 모집하면서 학생들은 '쌔큰한 신입생 환영'이라고 써 붙인다. 새큰하다면 섹시하면서도 청순한 이미지의 여성을 의미한다. 교수에게도 '선생님은 레알 넘사벽 센스의 킹왕짱 오빠 같아요.' 할 정도로 은어가 난무하니 말하면 무엇하랴.(이걸 번역하면, 선생님은 정말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센스를 가진 최고의 오빠 같아요 정도가 될까.)
프랑스에 사는 회교도들이 음절의 앞뒤를 뒤집어 말하는 것을 베를랑(verlan)이라고 한다. 카페(cafe)를 페카(feca)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음절을 뒤집는 베를랑을 넘어서 우리 젊은이들은 이제 의미를 뒤집는데까지 와 있는 것이다. 이러다가 어느 날 우리 사회에서 '개놈'이라고 하면 정말 바람직하고 모범이 되는 남성을 의미하는 말이 되는 것이나 아닌지 걱정이다. 그래서 어느 날 어머니가 결혼을 앞 둔 딸과 함께 사윗감을 놓고 이런 말을 나누게 된다 상상하자면, 등골이 오싹해질 수밖에 없다.
'저 남자애 정말 사위삼고 싶은 개자식이로구나.'
/ 한수산(소설가·세종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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