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부집행위원장을 맡아 동분서주하고 있는 배우 유지태를 소개한 김에 영화제 얘기를 한 번 더 해보려 한다. 내가 집행위원장을 맡아 이끌고는 있지만 영화제의 방향과 주제, 그리고 상영되는 영화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과 되풀이해서 말을 나누어도 그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지난 2회 영화제 때의 일이다. 〈저 달이 차기 전에>라는 작품이 상영되고 감독과 관객들의 열띤 토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다큐멘터리 〈저 달이 차기 전에>는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의 파업사태를 다룬 다큐멘터리로, 현 정부 들어 여러 가지 사회적 이슈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이 작품이 다룬 소재는 상당히 민감한 사안이었다. 실무진들이 상영작들을 정해 보고했을 때 이 작품뿐만 아니라 용산사태를 다룬 작품까지, 정부와 경기도에서 촉각을 곤두세울 수 있는 영화들이 여러 편이어서 솔직히 적잖이 걱정이 되었다. 영화제가 경기도의 예산으로 운영되고 있으니 나로서는 당연한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날 관객과의 대화를 지켜보고 나서 나의 걱정은 순전한 기우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부분 어른들의 질문들이 이어지고 있던 중간에 한 남자 고교생이 손을 들고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너무 가슴이 아파 눈물이 났다. 하지만 지나치게 노동자의 입장만 대변한 것은 아닌가? 사측의 입장이 어땠는지도 궁금하다"고 물었다. 이 질문 하나에, 그리고 그 질문에 반응하는 다른 관객들의 모습에 나는 내가 영화제를 처음 시작할 때 가졌던 원칙이 여전히 올바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지원을 아끼지 않되 내용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는다!' 문화 행위로서의 영화 창작과 그 행위의 결과물이 소개되는 장으로서의 영화제, 이 모두 그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한 성공을 기대할 수 없다. 이는 영화제 시작 전 이미 경기도와 공유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실제 한 사회의 문화가 융성하기 위한 전제가 된다. 사회의 주류 질서는 잘 갖추어진 기존의 체계에 흠집을 내고 틈입해 들어오는 비판의 목소리에 알러지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항원과 항체가 만나 다투는 과정에서 한 유기체가 더 건강한 체질로 발전하듯, 사회 또한 마찬가지이다. 쌍용차 사태를 다룬 다큐멘터리는 사회의 주류 의견에 대한 반론이고, 이 어린 관객의 질문은 그 반론에 대한 또 다른 문제제기이다. 다양한 시선이 거리낌 없이 주장되고 이들이 한데 어울려 담론을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사회발전의 원동력이고 문화 진흥의 밑바탕이 된다. 내가 영화제라는 장에서 찾고자 했던 것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민주주의는 나의 주장이 아니라 타인의 생각을 먹고 자란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고 내 주장을 스스럼없이 펼치는 과정에서 사회는 성숙하고 문화는 풍성해지는 것이다. 나와 다른 시선을 부정하는 순간 사회는 뼈만 남고 문화는 시들어간다. 건전하고 정당한 시선은 누군가가 규정해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견이 충돌하며 수렴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내친김에 올해 DMZ영화제의 홍보영상 - 보통 '트레일러'라고 불린다 - 을 맡은 일본의 세계적 감독 사카모토 준지의 이야기를 덧붙여볼까 한다. 영화 〈KT>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사카모토 감독은 처음 제안을 받고 흔쾌히 승낙했지만, 제작비가 100만원이라는 소리를 듣고 잠시 고민했다고 한다. 하지만 약속은 중요하고 DMZ영화제의 의미를 잘 알기에 원래대로 제작을 진행하기로 했다고 한다. 물론 100만원은 100만 엔(한화 약 천만 원)을 잘못 전해 들어서 생긴 오해이지만, 사실 천만 원도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기는 하다. 사카모토 감독이 한국을 방문한 뒤 만난 자리에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옳은 것을 옳다고 이야기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내가 영화를 하는 이유이다." 어림없는 제작비로도 기꺼이 영상제작을 수락한 것이 그지없이 고맙기도 하거니와, 그가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시 한 번 DMZ영화제의 의미를 되새기도록 한다. 이제 정확히 100일이 남은 영화제를 생각하며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는 것을 어쩔 수 없다.
/ 조재현(경기도문화의전당 이사장·연극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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