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행사 중 하나인 베니스비엔날레는 1895년에 시작되었다. 그 역사적 전통을 자랑하는 만큼 해마다 내거는 주제 또한 세계에 던지는 파장이 크다. 21세기가 시작되는 2000년에 열린 베니스건축비엔날레의 주제는 '덜 미학적인, 더 윤리적인(Less Aesthetics, More Ethics)'이라는 문구였다. 나도 그 전시회에 초청을 받아 참가하였지만, 이 주제를 접하고는 적지 않게 놀랐다. 내가 아는 한, 서양건축사에서 윤리라는 단어는 그리스시대 이후에 사용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윤리는 우리 선조들의 덕목이었다. 우리의 선조들은 집을 지을 때 늘 자연과 건축과 인간 간의 관계를 염려했으며, 집은 그 관계를 잇는 고리의 역할이었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집의 형태는 기와집·초가집 뿐이었지만 내·외부의 공간은 주변의 조건에 따라 변화가 무쌍하였다. 그러나 지난 시대 우리는 근대화가 서양화인 줄 착각하게 되면서 이 아름다운 윤리의 방식을 추방하고 서양이 일러준 미학의 성취를 위해 열심히 매진하고 있는데, 이제 서양은 윤리를 끄집어 내며 새 시대 새로운 화두로 삼는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서양건축사 책을 펼치면 처음부터 끝까지, 신전과 성당, 왕궁이나 별장, 경기장, 공연장 등 기념비적 건축물의 나열이며, 이들 건축에 대한 형태와 비례, 장식이나 재료 등에 관한 미학적 해설로 일관한다. 즉 한 건축물 자체만의 존재방식과 그 역사가 서양건축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스펙터클한 풍경의 역사는 적어도 6천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거대 구조물인 지구라트가 우르에 세워졌고, 주변을 압도하는 그런 풍경 만들기는 통치자의 절대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가장 유효한 방법이었다.
도시 또한 마찬가지여서, 스펙터클한 건축물을 곳곳에 배치하고 이들을 대각선의 각도로 이어서 가장 스펙터클한 광경을 확보한 곳에 그 도시를 지배하는 자의 궁전을 두면, 이게 바로 봉건시대의 도시가 된다. 현대의 신도시들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중앙로가 있고 중앙공원 중앙광장 그리고 중심지구 같은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현대도시라면 이들 또한 봉건적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증좌라고 할 수 있으며 이 모두가 스펙터클의 사회를 꿈꾸고 있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새로운 시대로 접어든 서양은 이제 그 스펙터클의 역사를 폐기하자며 윤리의 사회를 주장하고 나온 것이다.
20세기 사회에 대한 절망으로 자살한 프랑스 철학자 기드보르는 그가 쓴 '스펙터클의 사회'란 책에서, 스펙터클은 종교적 환상의 물질적 재구성이라고 하며 우리의 진실한 삶을 시각적으로 부정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그게 받아들여졌을까?
문제는 우리의 사회다. 서양문명의 파편에 종속되어 윤리의 건축과 도시를 팽개친 지 오래지만, 스펙터클 사회에 대한 추종은 이미 도를 넘었다. 특히 민선 지방자치시대가 도래한 다음, 임기 내에 가시적 성과를 내세우기에 혈안이 된 민선단체장들의 스펙터클한 풍경 만들기를 위해 우리 사회는 너무 많은 대가를 치르고 있다. 곳곳에 랜드마크, 테마공원, 혁신도시, 기업도시, 무슨 프로젝트 등으로 도시의 풍경은 괴기하게 되었고 우리의 아름답던 산하와 마을들은 죄다 삽질과 분탕질로 미증유의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 달 어느 중앙일간지에서 1980년대 이후 조성된 건축물 중 가장 좋은 것과 나쁜 것 각각 다섯 장소에 대해 식견 있는 건축가와 건축학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통해 조사한 적이 있었다. 가장 나쁜 다섯 예로, 광화문광장, 청계천복원, 예술의 전당이 각각 상위에 선정되었다. 모두 역대 정권과 단체장이 야심차게 추진한 스펙터클의 대표적 보기였다.
기드보르는 다시 이렇게 이야기한다. 스펙터클은 기만과 허위를 공통적 기반으로 서며, 역사와 기억을 마비시키는 현존하는 사회조직이다. 그래서 서양은 이제, 그들이 만드는 도시와 건축의 목표는 미학이 아니라 윤리라고 했으며, 이미지가 아니라 이야기여야 한다고 했고, 완성된 게 아니라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여전히 보이는 것 만들기에만 올인하는 자체단체장들이 곱씹으며 들어야 할 말 아닌가.
/ 승효상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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