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해보니 어떴습니까.
"법복이 무거웠어요. 시비를 가려야 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던 거죠. 생각이 많았던 시기였습니다. 판단이 힘들 때도 적지 않았고요. 짧은 인생을 생각하면 조금 일찍 퇴임해서 자유롭게 살아봤어야 했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법원을 떠났다는 실감이 안 나네요."
-낙향한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고향집에서 1년 정도 쉴 생각입니다. 텃밭도 가꾸고 참선도 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해 보겠어요. 우선 85세 어머니를 봉양하겠습니다. 척추를 다쳐 거동이 불편하시거든요. 밥숟갈도 떠드리면서 병 수발을 도맡아 온 아내의 수고를 좀 덜어주고 싶어요."
-변호사 개업을 당분간 않는다는 거죠.
"공포 즉시 시행해버린 '전관예우 금지법' 때문입니다. 몇 개월 쉬고 경제활동을 하려 했는데 운신에 제약이 생긴 거예요. 노모를 모셔야 하고 가정 형편이 그다지 넉넉하지 못하다고 해서 (대법관 출신이) 1, 2심 사건을 맡기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변호사 업무를) 쉬게 되더라도 '전관 특혜'에 대한 국민적 염려가 담긴 법인만큼 나부터 감수하겠다고 결심했던 겁니다. 이 법을 계기로 국민의 그런 우려가 불식되고 사법부에 대한 신뢰로 연결됐으면 합니다."
지난 3월25일 공개된 이 전 대법관의 재산은 대법관 14명의 평균 재산(22억6655만원)에 훨씬 못 미치는 13억2446만원이다. 개정 변호사법에 따르면 그는 대법원과 대검찰청 사건만 빼고 나머지 법원과 검찰청 사건은 맡을 수 있다. 대법관 출신은 변호사 생활 2~3년이면 수십억원씩 벌 수 있다는 게 공공연하다. 그래서 법은 물론 체면도 지키겠다는 것이다.
-가족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아내가 힘들어하는 걸 보면서 살았기 때문?┗?부분이 많이 가슴 아팠습니다. 가족에게 미안하죠. 그러나 재테크 등 여러 유혹을 근본부터 차단해 그간 자유로웠다는 판단으로 이번에도 이해해 줬거든요. 고마울 따름입니다."
-법관의 길을 왜 택했나요.
"경기고를 다닐 때는 이과를 선택했어요. 우주물리학이나 원자력공학에 관심이 많았고 수학도 꽤 잘 했기 때문입니다.(웃음) 지금도 스티븐 호킹 박사의 책들을 옆에 두고 읽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이공계로 진학해 학문적인 욕심을 부리면 외국유학을 가야 하는데, 집안사정이 여의치 않아 꿈을 접었어요. 대신 새로운 꿈을 품었죠. 법대에 입학한 뒤엔 경기고·서울대 동기(65학번)인 고 조영래 변호사, 민주당의 손학규 대표와 김근태 상임고문 등과 거의 매일 학생 시위를 하다시피 했어요. 이 때문에 검찰조사를 받고 벌금형도 받았습니다. 이처럼 어두운 시대를 겪으면서 수사 권력과 행정 권력에 희생되는 억울한 사람들이 제대로 법의 판결을 받도록 도와주고 싶었어요."
-대학 동기들이 쟁쟁합니다.
"법대 동기로 황우여 한나라당 원내대표, 강만수 산은금융그룹 회장,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 등이 있어요. 황 원내대표가 정치인으로 들어선 건 의외라고 봐요. 평생 판사 할 사람으로 보였거든요. 정치에도 그런 성실함이 통하나 봅니다. 손 대표는 학생시절부터 친화력이 매우 뛰어났어요. 김 상임고문은 우직해서 정치자금으로 고민해 올 때 '네가 살아온 대로 하라'고 말해 준 적이 있네요."
-법관으로서 후회는 없습니까.
"없습니다. 판사로서 보람과 긍지가 있었는데요. 열심히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니까 판단이 옳았어요. 법관이 천직이더라고요.(웃음) 죽고 나서도 내 마음은 사법부에 묻고 싶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언제지요.
"1977년 우리나라가 고통스런 시기를 거칠 때 법관생활을 시작했어요. 처음부터 힘들었던 거죠. 형사 단독 판사시절에는 몇 번이나 사표를 내려고 했어요. 1974년 시행된 대통령 긴급조치1호에 따라 유죄 판결하는 건 너무 힘들었습니다. 지금도 양심 때문에 한 평생 가슴에 안고 살고 있습니다.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유신시절 긴급조치 위반사건에 유죄판결을 한 판사 명단을 공개했을 때 대법관직을 그만두려고 한 달 동안 고민했어요.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긴급조치1호를 전원 일치로 위헌결정할 때 나 역시 위헌 주장을 펼 수 있어서 다행스러웠습니다."
-사법부 내에선 진보계로 불리던데요.
"내가 진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법관이 특정 성향에 치우치게 되면 법 해석을 잘못할 수 있죠. 상당히 경계해야 할 대목입니다. 어느 쪽에 편향된 판결이 아니라 다 같이 인간답게 사는, 헌법정신에 부합되도록 판단을 하려고 노력했던 겁니다. 사법부가 도와주지 않으면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어디서 찾을 수 있겠어요. 가톨릭 신자지만 법관으로서 편협하지 않기 위해 불교 경전도 많이 읽고 참선을 20년 넘게 매일 아침·저녁 30분씩 해오고 있습니다. 참선을 하다 보면 좌우와 동서남북이란 게 없지요. 양쪽을 같이 봐야 합니다. 내 철학은 중도와 중용입니다."
이 전 대법관은 지난 5월 퇴임을 앞두고 가진 광주고법 강의에서 "다수 의견에 부합되더라도 개인에게 인내하기 어려운 고통을 강요하고 그 고통이 소수의 개인을 비참한 존재로 전락시킨다면 그런 행위는 허용될 수 없다"고 밝혔다. 또 대법관 시절인 2009년11월 전주지법 정읍지원을 찾아 개원 100주년 특강을 통해 "사법부는 (신자유주의의 확장으로 소홀해지고 있는) 경제적 약자 배려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후배법관들에게 주문했다.
-중도 지키기는 어떠했습니까.
"우리나라는 미국 등에 비해 한쪽으로 쏠림 현상이 있어요. 그건 사회가 아직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법관은 삶의 철학을 떠나, 마땅히 중도와 중용을 지켜야 합니다. 한 쪽으로 치우치면 법 해석이 자칫 균형을 잃을 수 있어요. 그러나 중도를 해보면 내 편이 아무도 없어요. 외톨박이가 되는 겁니다. 외로울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법관은 외로운 생활을 감수하고 이겨내야 해요. 수행하듯이. 양극화와 각종 대립이 심한 우리 사회에서 중용은 매우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러면 법을 통한 사회통합도 가능하겠어요.
"그렇습니다. 우리 내부의 사회 통합은 중요해요. 소외계층과 약자에 대한 관심이 특히 필요합니다. 존 롤스의 '정의론'에서 나오지만 능력 있는 사람의 능력은 그 자체가 사회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자본이죠. 능력 있는 사람이 세금을 많이 내고 큰 돈을 기부하는 것 또한 그 때문입니다. 그게 정의에 합당합니다."
-판결에선 그런 정신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나요.
"기본적으로 헌법정신을 찾는 겁니다. 우리 헌법상 최고 이념인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하도록 심혈을 기울였어요. 정의를 찾아 정의에 맞게 판결해야 했던 거죠. 형식적으로 법리만 적용하는 판결보다 깊은 철학적 사유를 통해 법리뿐 아니라 정의에 맞는 판결을 내놓아야 합니다."
-사형제 존폐 논란이 끊이지 않는데요.
"그건 입법정책의 문제입니다. 국민들의 다수가 그렇다고 생각하면 그쪽으로 가는 게 맞아요. 난 사형제 폐지 생각을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인간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가요. 용서하고 포용하는 세상이 필요합니다. 재판에는 오판도 배제할 수 없어요. 사회복귀를 늦추거나 사회와 격리하는 방법을 추진해야 합니다. 세계적으로도 폐지 쪽으로 흘러가고 있지 않습니까. 종신형이 보기에 따라서는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인간의 생명이라는 걸 존중하는 의미에서 사형제를 존치하는 것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최근 사법부의 FTA 갈등 양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판사들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표현의 자유가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한쪽에 치우쳐선 안 돼요. 판사로서 정책중립성과 충돌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번 기회에 국민의 인식에 맞춰 공론을 벌일 수 있길 바랍니다. 모든 건 주인인 국민에게 물어봐야죠. 정책결정도 마찬가지여서 국민의 의견을 충분히 들은 다음 추진해야 합니다."
-정치할 생각은 없나요.
"법관은 법관으로 끝나야 합니다. 그 쪽엔 본래 생각이 없어요. 정치보다 평화적 남북통일 문제 등에서 국가에 도움이 될 만할 걸 찾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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