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여러 권 내다 보니, 내가 다 벗겨진 것 같아요. 힘들게 집 걸머지고 다니는 달팽이도 우습고, 제 집도 아닌 소라껍데기 몸 담고 달팽이는 더 가관이고…. 서두를 필요 없이 홀가분하게 살려고 했더니, 내가 민달팽이가 된 것 같습니다."
느릿느릿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도 작가는 일상의 낱낱을 기록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시쓰기를 위한 일상'처럼 보일 정도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메모와 스크랩으로 남아 시의 재료로 활용되곤 한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매일 새벽에 쓰던 일기가 시쓰기로 변화된 것이라고 하지만, 기쁘고 슬픈 심지어 원망스러운 순간까지도 관조해 정서적 공감을 이끌어낸다.
"열 두 권의 시집을 내는 동안 질 높은 시를 써보려고 행간을 넓히고 또 깊게 하는 노력을 했으나 허기와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선배의 지도 없이 "이렇게 써도 되는 건가"라고 자문했던 경계를, 넘을 수 있었던 것은 '다작'과 '과작'의 사이를 갈지자로 다니며 쌓은 내공 덕분이다.
이번 시집에도 풍·정·한·기·원으로 엮어 풍류, 세정, 회환, 운기, 소원으로 갈래를 탄 뒤 대자연을, 그리움과 사랑을, 한 서린 삶을, 지혜와 용기를 되새겨보는 거울로 만들어냈다. 어떤 가면도 거부한 채 사소한 여담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정직한 서정이 미덥다.
치열하게 살아왔던 스스로에게 피로한 몸을 누이고, 소중한 이에게 편지를 쓰고, 고독과 마주하며 자신을 비우고 채울 공간으로 그의 시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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