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지 돌출'이란 말이 있다. 느닷없이 솟아오른 융기. 박배엽 시인(1957~2004)은 전북 문단에서 바로 그런 경우다. 경남 구미에서 태어나 전주고를 졸업한 뒤 대학 입학을 마다하고 철학·역사 공부를 탐닉한 그는 남민시 동인이자 전북민주화운동협의회 간사, 전북대 앞에서 '새날서점'을 운영한 이력이 전부. 시인보다도 더 시인 같은 삶을 삶았기에 전북 문단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지만, "동시까지 탈탈 털어봐야 20여 편이 그칠 정도"로 문단 이력은 소박하다. 이런 그가 전북 문단에서 '전설'로 기억되는 것은 어쩌면 세상의 무의미에 대해 문학의 무의미로 맞서는, '박배엽식 복수'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뜻일 게다.
영화평론가 신귀백씨(53·정읍 배영중 교사)가 처음 메가폰을 잡아 찍은 '미안해, 전해줘'는 "시집도 없고 무덤도 없는, 그러나 모두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박배엽 시인의 삶을 추적한 장편 다큐멘터리다. 왜 하필 지금 박배엽이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감독은 "엄벙한 순정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인 시절, 그 중심에 박배엽과 친구들이 있다는 되감기 버튼을 누르고 싶었다"고 했다. 내레이션과 자막 없이 느릿느릿 과거로 흘러가는 '박배엽행 열차'는 1970~80년대 군사정권으로 부글부글 끓던 속을 막걸리잔으로 간신히 잠재우던 문청들의 시절을 추억한다.
"하지만 박배엽을 모두 알 거라는 환상이 편집상 가장 큰 문제였어요. 그가 체 게바라도 아니고 실체가 없었거든요. 전주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고 전주의 풍광 속에서 전북의 인물을 담았다는 사실에서 의미를 찾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북이 최고라는 이기심이나 우리가 최고라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도 박배엽 같은 사람이 있었을 테니까요."
이강길 프로듀서와 감독은 그의 제를 지내는 친구들을 인터뷰하고 생전에 운영하던 새날서점이 위치한 전북대, 부안의 내소사, 진안·무주를 넘어 지리산 대성골까지 훑으면서 "그가 쓴 시는 원고지가 아니라 세상이었다"는 지인들의 값진 고백을 받아냈다.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는 그가 이념과 역사에서 억압하지 않는 문학은 사람에 대한 애정과 열정으로 귀결됐다는 것. 안도현 시인은 "배엽이 형만큼 뜨겁지도 않고, 배엽이 형만큼 정신의 어떤 급진성도 없고, 우리는 배엽이 형만큼 호쾌하지도 못했다"고 기억했고, "박배엽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는 김용택 시인도 "그러나 배엽이의 문학이 늘 두려움을 줬다. 문학적으로 뭔가, 다시 한 번 반성하게 되는 그런 인간이었다"고 털어놨다.
결국 이 영화는 인간과 삶에 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사회 부적응자로 보는 요즘 현실에서, 선후배 술값을 다 내고 다니면서 인간과 인간과의 만남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를 물어온 그에 대한 오랜 그리움의 결정판이다. 감독은 개봉을 앞두고 "펜으로 긁었던 악평에 대한 죗값을 톡톡히 받은 것 같다. 부족한 것투성이"라며 걱정했지만, 지인들은 7년 만에 박배엽을 만나러 가는 완행열차가 그저 반갑기만 하다.
고스트필름이 제작하고, 전주영상위원회와 전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의 지원을 받은 '미안해, 전해줘'는 29일 오후 2시, 2월5일 오후 5시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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