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둔산 최후 항전지는 일반인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120년의 세월이 지난 현재에도 항아리 파편과 기왓장 조각들이 상당수 남아 있다. | ||
동학농민혁명 발생 2주갑(120년)을 맞아 완주군 운주면 대둔산 7-8부 능선에 자리잡은 ‘대둔산 최후 항전지’를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산15-1번지 해발 715m의 거대한 암반의 상단에 자리한 최후 항전지는 동학농민군이 1894년 11월 중순부터 다음해 2월 18일까지 3개월여 동안 관군·일본군에 맞서 싸우던 곳이다.
1999년 이곳을 지표조사한 신순철 원광학원 이사장(당시 원광대 사학과 교수)과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당시 사학과 박사과정)은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티에서 패하고, 주력부대가 논산을 거쳐 김제 원평으로 물러나면서 다시 패한 후, 태인의 마지막 전투를 거치며 소멸의 길을 걸었다”며 “하지만 일부 동학농민군은 동부 산간지역으로 숨어들어 끝까지 항전했는데, 이들 지역 중 한곳이 대둔산 최후 항전지”라고 설명했다.
대둔산 최후 항전지는 다른 지역의 동학농민군이 대부분 사라진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저항, 동학혁명의 정신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주한일본공사관 기록’에 따르면 50여명의 동학농민군은 최후 항전지에서 자연동굴과 절벽 위에 3채의 집을 짓고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관군과 민보군의 대포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항전을 이어갔다.
1895년 2월 18일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공격으로 함락되었을 때도 항전의 의지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 동학농민군은 대부분 사살 되거나 절벽에서 뛰어 내리며 저항했고, 소년 1명만이 살아 남았다.
최후 항전지는 암벽등반가들이 아니면 접근하기 힘든 곳에 자리잡아, 당시 원형이 상당부분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더하다.
이곳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는 대둔산 마천대 정상에 올랐다 다시 내려오는 방법과 계곡에서 접근하는 방법이 있지만, 등산로가 따로 없어 일반인에겐 무척 까다롭고 힘든 루트이다. 한 덩어리의 바위로 이뤄진 항전지는 높은 곳은 120m이고, 가장 낮은 서쪽도 4m 정도의 절벽 형태이다.
완주군은 사학계의 문화재 지정 주장에 대해 “최후 항전지에 대한 현장조사와 사학자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한 후 전라북도와 함께 문화재 지정 등 절차 여부를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대둔산 항전지는 등록문화재로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며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맞아 타지역 유적지와 함께 문화재 등록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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