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의 손길이 더해지며 세상 풍경은 십 년이란 말이 무색하게 더 빠르게 변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우리 주변에서 묵묵히 세월을 견디며 함께하는 사물들도 많다. 그렇기에 무언가 독특한 모양의 돌이나 바위를 보면 우리 조상들은 특별한 이름을 지어 부르며 그만의 이야기를 만들어주었다. 동네 어귀 근처 혹은 길가에 남아, 어떤 것은 풍자로 웃음을 짓게 하고, 어떤 것은 소원을 그리고 안타까운 사연이나 슬픔을 품으며 우리 곁을 지켜왔다.
△남원시 인월면 ‘피바위’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의 바위가 그렇다. “달을 끌어낸다.”는 뜻의 ‘인월(引月)’이라는 지명과 붉은빛을 띤 바위라는 뜻의 ‘혈암(血巖)’ 곧 ‘피바위’라는 이름에는 그만의 전설이 전해진다. 고려 말 3000여 명의 왜구가 지리산 일원에서 노략질을 일삼을 때, 조정에서는 토벌을 위해 활 쏘는 실력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신궁’ 이성계를 보낸다. 이성계는 기습을 계획하고 황산에서 기다렸지만, 적장 아지발도는 황산에 이르기 전 진지로 되돌아가고는 했다. 고려 침략 전 누이로부터 “황산을 조심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경고를 받았던 것이다.
이성계는 꾀를 내어 할머니 한 명을 아지발도에게 보냈고, 할머니는 “이곳에 황산이라는 곳은 없다.”고 거짓말을 해 그가 안심하고 황산에 이르게 하였다. 작전에 성공한 이성계는 어두운 밤에도 활을 쏘기 위해 달이 뜨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고, 기도에 화답하듯 그믐밤임에도 밝은 보름달이 떠올라 화살이 적장의 목구멍을 꿰뚫었다. 이때 람천에 있는 바위에 적장과 왜구들이 흘린 붉은 핏자국이 남아있다 하여, 이 지역을 인월로 바위를 피바위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피바위의 붉은 흔적은 이성계의 호국 전설보다도 훨씬 이전의 세월을 품었을 수 있다. 철기시대를 이끈 지역의 산물로 더 거대한 역사를 말이다.
기록을 보면 설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이성계의 왜구토벌 활약 상황이 중심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중기에 기록된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운봉(雲峯) 팔량티(八良峙)에 피바위[血巖]가 있는데, 이것은 태조가 왜장 발도(拔都)를 쳐 죽인 곳으로 돌 위에 얼룩진 피가 지금까지 생생하다. 임진년에 바위에서 피가 맺혀 흐르고, 왜적이 왔으니 괴이한 일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연려실기술』에 기록된 피바위에 대한 내용 원문
바위에 관한 전설은 기록만이 아니라 인근 마을 주민 구전을 통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특히 피바위 위에서 음식을 먹으면 건강한 기를 받을 수 있으며 바위가 잡귀를 물리치고 우환을 막아 준다는 속설 때문에 바위 부스러기를 따로 보관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전해져오던 피바위의 전설이 최근 과학적 분석 및 여러 지질학자의 검증을 통해 그야말로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에 따르면 피바위의 붉은빛은 과거 우리나라를 침략한 왜구의 피에 물든 것이 아니라, 일반 바위보다 높은 바위의 철분 성분이 오랜 시간 물에 닿으면서 산화해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어떤 것은 과학적 검증보다 오랜 세월이 품은 이야기의 힘이 더 센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그 사연을 그대로 지역의 자산으로 간직함이 좋을 듯싶다.
피바위로부터 멀지 않은 구간, 전라북도 순창에는 섬진강을 호위하듯 들어선 장군목이 있다. 주변 산봉우리가 신비롭게 웅장하게 마주 선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 형상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장구목으로도 불리는 이곳에는 수만 년 동안 섬진강 물살이 다듬어 놓은 기묘한 바위들이 약 3km에 걸쳐 드러나 꿈틀거리며 물결치는 형상을 지니고 있다. 그중에서도 강물 중심 바위 중 툭 도드라져 가운데가 움푹 파인 바위 하나가 눈길을 끈다. 바위 가운데가 파인 모습이 마치 요강 같다고 하여 이 바위에는 ‘요강바위’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순창군 장구목 ‘요강바위’
요강바위는 둘레 1.6m, 깊이 2m, 폭 3m, 무게 약 15t으로 움푹 파인 외형이 강한 인상을 준다. 그 파인 공간은 사람이 들어갈 만큼 커서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5명이 토벌대를 피해 몸을 숨겨 목숨을 건졌다는 일화가 있으며, 아이를 못 낳는 여인들이 요강바위에 들어가 지성을 들이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이다. 독특한 외형과 이름만큼이나 역사의 아픔과 개인의 소망까지 소중히 간직한 자연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유명세에 억대의 비싼 가격까지 매겨진 탓에 1993년에는 중장비까지 동원한 도석꾼들에 의해 바위가 도난을 당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요강바위를 내가기 위해 도석꾼들은 오랜 시간을 들여 길을 낸 탓에 길을 정비하는 인력으로만 알고 주민들도 상황을 잘못 짐작했다 한다. 하지만 다행히 1년 6개월 만에 마을주민들의 노력으로 되찾아 와 지금의 자리에서 지역의 상징이 되고 있다.
△요강바위 주변 지형이 드러난 여지도의 순창군 일부
사시사철 그 모습이 변하지 않는 피바위와 요강바위 같은 바위의 모습들은 긴 시간을 통해 자연이 빚어낸 세월의 흔적으로 우리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짧은 인간 생애 속에서 긴 시간 동안 변화를 거듭해오며 지금의 모습을 지키고 있는 바위를 바라보면 자연과 시간에 대한 경이로움을 품게 되는 듯하다. 유독 바위에 관해 여러 전설과 이야기들이 전해지는 것은 그와 같은 이유에서다.
지난 5월에는 임실의 사라졌던 동자바위가 한 독지가에 의해 복원되었다. 복원 이후 마을을 찾아가 보니, 되살아난 동자바위가 어르신들 틈에 어울려 능청스런 웃음을 짓고 있었다. 지역 이야기는 사람들의 삶의 흔적에 따라 끊임없이 만들어지며 또 사라지기도 한다.
브뤼셀의 상징으로 유명한 ‘오줌싸개 소년(Statue of the Pissing Boy)’도 프랑스 루이 15세가 약탈해 간 후 다시 되돌려졌다는 일화를 지낸 채 도시를 상징하며 사랑받고 있다. 사라졌을지라도 지역 이야기가 품었던 흔적을 발굴하고 다시 살리는 것이 지역만의 정체성을 이어가는 일이라고 믿는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것보다, 지역에 구전되거나 기록에는 남아있지만, 사라진 흔적을 발굴하여 복원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 오랜 세월 소박한 모습으로 자생했던 식물들도 다시 지역의 이야기와 더불어 꽃과 나무로 피어나게 해야 한다. 이것이 지역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긴 여정이 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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