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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초의 시인 가람

빼어난 가는 닢새 굳은 듯 보드랍고/자짓빛 굵은 대공 하얀한 꽃이 벌고/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본대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두고/미진(微塵)도 가까히 않고 우로(雨露) 받어 사느니라

 

국어학자이자 현대 시조시풍을 정립한 인물 가람 이병기 선생의 대표작 ‘난초 4’ 전문이다. 일석 이희승은 ‘시조 하면 가람을 연상하게 되고, 가람 하면 시조가 앞서게 된다’고 했을 만큼 가람은 ‘난초의 시인’이다. 그의 제자인 고하 최승범 전 전북대교수는 “단지 스승의 애란을 두고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스승의 한생을 우러러볼 때 가람은 난이요, 난은 곧 가람이다”고 말했다.

 

1968년 고향집 수우재(守愚齋)에서 78세를 일기로 작고한 그에게는 세가지 복이 있었다고 한다. 평생 난초를 사랑해 생긴 난초복을 비롯해 술복, 제자복이 그것이다.

 

그의 고향 여산 사람들은 그의 시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다. 육군부사관학교 쪽에서 여산소재지 방면으로 들어가는 길목, 막걸리 주조장 쪽 일반 건물 벽면에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로 시작하는 싯구를 써붙였으니 말이다.

 

주시경 선생에게 조선어를 배우고, 고문헌 수집과 시조 연구에 몰두했던 가람은 창씨개명에 끝까지 응하지 않은 올곧은 지식인이었다. 그가 일제시대 때 쓴 시와 수필 어느 곳에서도 친일 문장이 발견되지 않았을 만큼 ‘미진도 가까이 않고 우로받아’ 난세를 살았다.

 

가람은 1930년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위원, 1935년 조선어표준어 사정위원 등으로 활동했고,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1년가량 옥고를 치렀다. 50여년간 매일 일기를 쓰며 ‘후회없는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고 전해진다.

 

광복 후인 1954년 백철과 ‘국문학전사’를 공저하는 등 한글과 국문학 발전에 평생을 바쳤다. 고문서 수집광이기도 했던 그는 인현왕후전, 가루지기타령 등 수많은 고전을 발굴해 펴냈고, 가람시조집, 가람문선, 가람일기 등 문집도 남겼다.

 

가람이 태어나고 임종을 맞이했던 여산면 원수리 생가는 지방기념물(1973년)로 지정돼 있다. 조선 후기에 용화산 아래 지어진 생가는 초가집이고, 풍수지리적으로 배산임수 형세에 자리한다. 안채와 사랑채(수우재) 등 4채의 건물이 있다. 그 앞에 장방의 연못이 있다. 수우재와 그 기둥에 쓰인 안분신무욕(安分身無辱) 지기심자한(知幾心自閑)에는 집 주인의 삶이 엿보인다. 지난 10월14일 생가 옆에 들어선 ‘가람문학관’이 그 삶을 웅변한다. ·김재호 수석논설위원

김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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