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 대차리 일원에서 신라와 가야계 석곽묘가 발견되고, 신라 유물이 다량 출토돼 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동안 전북지역 신라계 유물들은 대부분 6세기 중반의 유물로, 이 때문에 신라가 외부로 확장했던 시기가 6세기 중반으로 알려졌었다. 하지만 이번에 발견된 유물들은 시기상 6세기 전후로 기존 학설보다 50여 년 앞선다. 신라의 외부 진출 시기가 알려진 것보다 빠를 수 있다는 가능성이 확인된 것이다.
이를 통해 신라의 외부 진출 시기와 가야-신라-백제 간 역학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무주군청과 군산대 가야문화연구소에서 조사 중인 ‘무주 대차리 고분군’에서 신라·가야계 석곽묘와 함께 전북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최대 수량의 신라 토기가 확인됐다.
이번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석곽묘(돌덧널무덤)는 모두 11기다. 도굴 등의 훼손 흔적이 남아있는 석곽묘는 잔존상태가 양호하지 않았지만, 축조방법 및 구조 등은 파악할 수 있어 또 다른 관심을 끈다.
이 중 9기는 할석(割石·깬돌)으로 벽체를 조성하고, 소석(小石·잔돌)으로 시상대(무덤 안에 시신을 안치하기 위해 바닥에 마련한 대)를 깐 형태이며 이는 옥천 금구리와 상주 헌신동, 남원 봉대리 등에서 확인된 신라계 석곽으로 확인됐다.
나머지 2기는 강돌(川石)로 벽체가 축조되고 바닥에 시상대가 없어 장수지역의 가야계 석곽묘와 유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출토 당시 석곽묘 안에서 대부장경호(굽달린목긴항아리), 단경호(목짧은항아리), 개(뚜껑), 고배(굽달린접시) 등 40점 이상의 신라 유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가야계 석곽묘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도굴 등으로 유물이 나오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전북에서 이처럼 신라 유물이 대규모로 발견된 것은 처음으로 이를 통해 신라의 외부 진출 시기와 가야-신라-백제 간의 역학관계에도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기됐다. 이번 유물이 출토된 무주 대차리는 금강 유역으로 신라와 가야, 백제가 세력을 넓혀 다른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요지이기 때문에 세 국가가 각축을 벌였던 곳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가야문화연구소 조명일 책임연구원은 “석곽묘의 구조와 유물로 볼 때 무주 대차리 고분군은 6세기 초를 전후한 시기에 조성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며 “이 시기 전북 내 신라의 진출 과정과 가야-신라, 백제까지 포함한 역학관계를 밝힐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김효종 기자·천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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