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한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전주행 고속버스를 탔다. 고향가는 고속도로를 달릴 때마다 항상 그러했듯, 이번에도 마음속에 가벼운 설렘과 푸근함이 일었다. 차창 밖을 보니 지난 여름 푸른 숲을 이루었던 나무들이 어언간 울긋불긋 단풍으로 갈아입고 늦가을 문턱에 들어서고 있었다. 조금 지나면 단풍 잎을 떨쳐버리고 하얀 겨울 속 깊은 동면에 들어갈 태세다.
빠르게 지나가는 나무들 사이로 문득 88년 서울올림픽 때 중국 국가대표선수단 임원들을 안내해 용인 한국민속촌을 참관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일행 중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던 한 사람이 스쳐가는 고속도로 주변 숲들을 보며 “전쟁 때 폭격으로 모든 산들이 처참하게 파헤쳐져 나무 한 그루 없었는데 언제 저렇게 우거진 숲을 이루게 되었는가? 정말 믿기지 않는다”고 놀라워 했던 장면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산림강국이 되었으나 불과 60여 년 전인 1950년대만해도 산림 총량이 현재의 5%에 불과했으며 벌거벗은 민둥산 비율이 50%에 육박하였다. 어릴 적 동네 산에 올라가면 떨어진 나무 잎까지 갈퀴로 싹싹 긁어가 땔감으로 쓰는 통에 땅의 붉은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본 강점기,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전국의 산들이 완전 황폐화 되었던 것이다.
해방 이듬 해인 1946년에 식목일 행사가 시작되어 막대한 양을 조림했고 1960년대까지도 벌목을 막는 엄격한 형벌규정이 있었지만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땔감용으로 나무를 베어 산림 황폐화를 막지 못했다. 1973년부터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여 매년 봄이 되면 전국민은 물론 정부기관, 단체 및 학교가 동원되었다.
제1차 치산녹화 10개년 계획 동안 속성수(速成樹) 중심으로 조림 목표량을 4년 앞당겨 달성한 후, 1979년 제2차 치산녹화 10개년 계획 때는 경제수(經濟樹) 조림 비중을 높였으며, 인건비 등 비용 상승과 사회적 요구를 반영해 자연 휴양림 조성 등으로 정책 방향을 옮겼다.
그 결과 오늘날 전국에 숲이 우거져서 산 오르기가 힘들 정도이고 맷돼지들이 민가로 나와 폐를 끼쳐 골치가 아플 지경이 되었다. 녹화사업을 위한 전국민의 노력과 함께 경제성장과 소득 증가, 농촌인구 감소 등의 영향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다 불현듯 어릴 때 학교 식목행사로 함께 산에 올라 나무도 심고 해충도 잡았던 옛 친구들이 생각났다. 그 중에 벌써 누구는 교통사고로, 누구는 못쓸 병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특히 같은 반 내 옆 짝꿍으로 앉았던 한 친구는 수업시간에 내가 선생님 질문에 일어나 답변하고 앉을 때 내 엉덩이 밑에 연필을 세워 연필심이 엉덩이 살에 박히게 했는데 몇 년 전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언젠가 만나 회포를 풀며 술 한잔 기울이고 싶었는데 말이다
기타 어릴 적 나에게 연을 만들어주었던 동네 형, 나를 많이 따르던 이웃 동생들, 찐 계란 하나라도 더 주고자 했던 전주 하숙집 주인 등 오랫동안 못 보았던 얼굴들이 떠오르며 아련한 그리움에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러자 감긴 눈앞에 지난 여름 영면하신 큰 누님의 웃음 띈 인자한 모습이 나타났다. 누가 그랬던가 ‘자녀가 많은 집안의 큰 누님은 어머니와 같다’고. 큰 누님을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아려온다. 믿는다. 지금쯤 아무 고통 없는 천국에서 평소처럼 해맑은 웃음지으며 즐겁게 지내실 거라고.
/송승엽 한반도 미래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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