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인간 생명을 유지하는 원천이기도 하지만, 고대 농경사회에서 현대 산업사회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생존을 위한 생산 활동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질이다. 자연계에서 인간에게 주는 물은 때로는 넘쳐나 커다란 수해를 입히기도 하지만, 이를 잘 이용하면 이익을 가져오기 때문에, 중국 전설시대 왕조의 군왕들은 물 관리를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음은 잘 알려져 있다.
선사시대 이래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농경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물 관리가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었을 것인데, 청동기시대의 원시 수리시설에서 역사시대의 발달된 관계수리시설들이 여러 형태로 발견되고 있다. 전라북도는 지형상으로 평야지대가 발달되어 있고, 강수량도 풍수하여 농경생활을 영위하기에 매우 적절한 지역이다. 따라서 타 지역에 비해 농경을 위한 수리시설유적들이 많은 편이며, 대표적으로 삼국시대에 축조된 김제 벽골제를 들 수 있다.
조선시대의 실학자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의 제언(堤堰)편에 보면 호남지역 3대 제언이라 함은 익산 황등제, 김제 벽골제, 고부 눌제를 일컫고, 이들 3대 제언을 호남과 호서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다. 이 가운데 황등제의 제방은 익산시 신용동 도치산에서 황등면의 황등산과 연결되며, 그 길이는 1.3km에 달한다. 현재는 23번 국도로 사용되고 있지만, 도로개량 이전의 원래의 도로구간이 일부분 남아 있어 이곳을 중심으로 최근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조사는 옛 도로 부지에 남아 있던 추정 황등제 제방 부지에 대한 시굴조사에서 확인된 유구를 중심으로 한 397㎡의 면적에 대해서 이루어졌다. 제방의 하단 기저부의 폭은 약 22m이며, 잔존높이는 4.9m로 확인되었다. 제방은 물이 침투하기 어려운 점토인 흙덩이를 교차 쌓기 하였다. 그리고 흙덩이 사이사이에 풀과 나뭇잎을 깔았는데 이러한 축조공법은 김제 벽골제 제방에서도 확인된다.
황등제의 초축 시기는 문헌상으로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조선 전기 기록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이전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수습된 목재와 풀 등 자연유물에 대한 자연과학적 연대측정을 한 결과 기원전 4~3세기경으로 측정되었다. 지금까지 서기 330년에 초축으로 알려진 김제 벽골제가 한반도 최고의 수리 제방으로 알려져 왔었는데, 익산 황등제의 제방이 벽골제의 제방보다 무려 600~700여년이나 더 오래전에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러한 연대측정결과에 대한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국내·외의 전문적인 기관 3곳에 의뢰한 결과, 위와 같은 동일한 연대가 추출되어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수리시설로서 익산 황등제를 상정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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