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지방자치 부활 30년을 맞는 해. 1952년 최초로 구성된 우리나라 지방의회가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중단된 뒤 30여 년 만인 지난 1991년 4월과 7월 기초 및 광역의회가 재구성되면서, 올해로 부활 30년을 맞았다. 지난 30년간 민주주의 토양 아래 뿌리를 내린 지방자치는 올해 새로운 전환점을 앞두고 있다. 지난 2020년 12월 전면 개정된 지방자치법이 오는 2022년 시행을 앞두면서, 지방자치단체의 권한이 더욱 신장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 30년전 군사정권이라는 어둠을 걷고 새롭게 출범했던 제4대 전북도의회를 돌아봤다.
30년 만에 부활한 지방자치제. 하지만 그 시작은 녹록지 않았다. 30년 동안 암흑기를 걸었던 대한민국의 지방자치를 다시 세우기 위한 기대보다 어려움이 더욱 컸다. 주민들은 물론이고 새로 선출된 도의원들마저도 지방자치제에 대한 인식조차 제대로 서 있지 않은 상황에, 지방자치제의 기반을 닦고, 기틀을 마련할 준비도 제대로 선행되지 않았다.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 과정을 거치며 어렵게 획득한 지방자치제지만, 역사에 비춰볼 때 이에 대한 평가는 만족스럽지 못한 게 사실이다.
전북의 지방자치제 시작은 제4대 전라북도의회 구성으로 볼 수 있다. 1991년 6월 20일 실시된 선거를 통해 전라북도의회 의원 52명을 선출했다. 비례대표 없이 선출직으로만 구성된 4대 도의회는 현 민주당의 전신인 신민당 소속이 전체 52석 가운데 51석을 차지했다. 의회가 부활한 첫 대에는 여성의원도 배출하지 못했고, 당시 전체 출마자 145명 가운데서도 여성 출마자는 단 1명에 불과했다.
부활한 지방자치 첫 도의회 4년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30년의 암흑기를 거치며 의정 경험이 없던 의원과 의회라는 견제기구에 생소한 집행부 공무원 사이의 이해 부족으로 곳곳에서 마찰이 빚어졌다.
도지사의 의회 출석을 두고도 회기 때마다 의회와 집행부 간 신경전이 벌어질 정도로 형식논리에 치우치는 모습도 보였다. 실제로 4대 의회 끝 무렵인 1995년에는 의회에 출석하지 않은 당시 조남조 도지사에 대한 해임권고 결의안이 발의돼 가결되기까지 했다.
처음 경험하는 지방자치제의 어려움 때문이었을까. 지역개발을 둘러싼 지역 이기주의적인 의정활동과 일부 의원들의 부정과 비리도 지탄을 받았다. 특히, 당시에는 도지가 중앙에서 임명된 과도기적 지방자치제였기 때문에 지방의회의 견제도 그만큼 한계가 있었다는 평가다.
그러나 다양한 특위 활동은 눈여겨볼 만하다. 지방의회가 부활한 첫해 처음으로 구성된 특위는 개원 17일 만인 1991년 7월 25일 추진된 군내버스 실태조사 특위였다. 전주시를 기점으로 주변 시·군 지역을 운행하던 완행버스가 군내버스로 전환되면서 지역주민의 환승 불편 등에 따라 대책을 마련한다는 취지였다. 특위 활동을 통해 군내버스의 전주 시내 진입 횟수를 늘리는 등의 조치가 이뤄지기도 했다.
4대 도의회에서는 이를 시작으로 모두 12개 특위를 구성해 활동했다. 1993년도 부안 위도에서 서해훼리호가 침몰해 292명이 사망한 사고와 관련해 수습대책특위가 만들어졌다. 이후 ‘새만금종합개발사업대책 특위’, ‘6·25 양민학살 진상실태조사 특위’, ‘관권선거 방지대책 및 조사 특위’, ‘골프장 관련 성금처리 조사특위’, ‘기업유치 특위’, ‘대형암반 관정개발에 따른 지하수오염 및 오폐수처리 조사특위’ 등이 진행됐다. 이같은 특위 활동을 통해 당시 시대 상황과 지역의 관심사가 무엇이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1993년 12월 쌀 수입개방 반대 전북도민 궐기대회에서도 모든 도의원이 합심해 투쟁에 나섰고, 분개한 도의원들은 삭발 투쟁 등도 이어갔다. 최근의 도의회 모습과 비교할 순 없지만, 당시 지역 정치권에서는 그만큼 투쟁심과 의지가 넘쳤음을 알수 있는 지점이다.
‘미약했지만 큰 첫 걸음’. 30년 만의 지방자치제 부활 이후 첫 전북도의회는 시작은 미흡했지만 현재 지방자치제의 기반을 마련하는 시간이었다는 평가다.
김철규 4대 전북도의회 의장
“풀뿌리 민주주의, 지방정부가 튼튼해야 중앙정부도 튼튼”
전북일보는 당시 상황을 듣기 위해 김철규 전 전북도의회 의장을 만났다. 1991년, 30년 만에 부활한 전북도의회 첫 도의장으로, 당시 지방자치에 대한 인식조차 제대로 돼 있지 않은 당시 상황에서 도의회를 이끌며 오늘날 전라북도의회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군산에 위치한 김 전 의장 개인 사무실에는 벽면 책장 가득 책이 꽂혀 있었다. 도의회 예산서와 새만금 관련 서적, 사진들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새만금’ 기사를 가장 먼저 쓴 기자라는 자부심도 엿보였다. 실제 김 전 의장은 1968년 전북일보에 입사한 이후 23년 동안 본보 사회부장, 편집부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하며 언론인으로서 수많은 사회 현상을 접한 경험이 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책장 위 김대중 대통령의 사진과 노무현 대통령의 얼굴이 그려진 액자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 철학을 이어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김 전 의장은 “지방자치제는 김대중 대통령이 재야시절부터 항상 강조하던 내용이다. 나 또한 지방 정부와 의회의 역할이 바로 서야만 민주주의의 근간이 확립될 수 있다는 정치적 철학을 갖게 됐다”면서 “지방정부가 튼튼하면 중앙정부도 튼튼하다. 이 때문에 지방의회에 진출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실제 한양대 지방자치연구소에 등록해 1989년부터 일본을 오가며 지방자치제도와 관련한 선진 사례를 연구하던 김 전 의장은, 1991년 선거에서 옥구 제1선거구에 출마해 70%에 이르는 득표율로 제4대 도의회에 입성했다.
의회 출범과 함께 실시된 의장 선출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의장직을 맡게 된 김 전 의장은 30년 만에 부활한 도의회의 제도적인 사항들이 시류에 맞지 않아 내규 및 조례를 개·제정하는 등 기초와 골격을 다지며 사실상 초대 의장 역할을 했다.
그는 “지방의회가 부활한 이후 첫 의장이다 보니 책임감이 컸다”면서 “(내가)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는 마음이 컸다”고 말했다. 특히, 당시 도청 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던 군사문화를 혁신하는 것도 도의회의 역할이었다.
의장 취임 후 첫 결재 안으로 의회 운영에 관한 사항이 올라오자 결재란에 부의장 결재란 등을 신설해 의원들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토록 하고 주민 ‘본위’의 도의회가 될 수 있도록 하는 등 각종 제도를 만들고 보완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5·16 쿠데타와 12·12사태를 생각하면, 지방정부의 역할이 더욱더 크다고 말한다.
그는 “중앙정부가 어떤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지방정부가 튼튼하다면, 과거와 같은 불행한 사건이 전국화되는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면서 “(내가) 지방정치를 하려고 한 이유이고, 그것이 지방정치의 역할이다”고 강조했다.
현재 지방정치에 대한 부족함과 그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지방자치제도가 부활한 지 30년이 지났지만,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미천한 수준”이라면서 “나아가는 게 아니라 멈춰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가장 큰 걸림돌로 ‘공천제’를 꼽았다. 공천제의 폐단을 막기 위해서라도 광역을 제외한 기초단체장과 의원의 경우는 공천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김 전 의장은 “기초단체장과 기초의회 의원들은 공천제가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게 맞다”면서 “주민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면 거기서 발전의 씨앗이 뿌려질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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