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立卽白山 座卽竹山). 서면 흰옷이 산을 이뤘고, 앉으면 죽창이 산을 이뤘다.
1894년 봄, 약 60만 명에 달하는 백성이 참여한 동학농민혁명은 이 땅의 민주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조선 말기 농민들의 억압된 삶과 봉건적 사회 질서에 대한 저항은 뜨거운 불꽃처럼 타올랐고, 단순히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넘어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당시 지속되던 '삼정의 문란'은 조선 후기 사회의 뿌리를 흔들었고 결국 동학농민혁명의 계기가 됐다. 사적인 원한으로 일어난 '반란'이 아니라 '혁명'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이 과거 반역으로 취급당했던 만큼 동학군의 후손들은 '역적의 자손'이라 불리며 손가락질받았다. 오늘날 혁명의 역사적 중요성이 인정됐지만 아직까지 이들에 대한 과도한 폄훼가 판을 치는 상황이다.
이에 본보는 동학농민혁명의 올바른 국민적 인식 확산과 지식의 저변 확대를 위해 기획을 마련했다. 이번 기획은 동학농민혁명이 한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거사임을 되새기며 올바른 인식을 함양하고, 각 지역 주요 유적지의 실태와 이를 둘러싼 현황을 살펴볼 예정이다.
구체적으로는 동학농민혁명의 시간적 순서에 따라 정읍(고부관아터)·고창(무장기포지)·부안(백산성)·정읍(황토현 전적지)·전남 장성(황룡 전적지)·전주(전주성)·김제(원평집강소)·완주(삼례2차봉기터)·충남 공주(우금치)·경북 예천(서정자들 전투지)·충남 태안(태안 교장바위)·경남 하동(하동 고성산)·강원 홍천(풍암리 전적지 자작고개)·전남 장흥(장흥 석대들)·충북 보은(보은 북실)과 황해 해주(해주성)를 차례대로 다룰 예정이다.
지난 달 22일 완산구 전주한옥마을에 위치한 동학혁명기념관. 이곳을 지나던 김 모 씨(40대·남)는 동학혁명기념관을 가리키며 "저걸 왜 '혁명'이라 부르는지 모르겠다"며 "사실 저건 나라를 혼란하게 만든 '반란', '반역'이라는 것을 알고있나"고 기자에게 질문했다. 그는 "지금처럼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는 문화를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근까지도 동학농민혁명에 관해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일본군이 국토를 유린할 수 있었던 것은 동학농민혁명 탓이다", "동학 폭동", "조선을 뒤엎은 반란군들이 어떻게 유공자로 모셔지냐" 등의 글이 게시되고 있다.
이처럼 동학농민혁명을 둘러싼 역사왜곡과 부정적 인식이 일부 국민들 사이에서 잔존하는 상황이다. 심지어 당시 지주계급이 그들의 자본을 지키기 위해 농민들을 부추겨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됐다는 '가짜뉴스'도 제기됐다. 이런 역사왜곡은 인터넷에 친숙한 젊은 세대에게 잘못된 역사관을 갖게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일부 커뮤니티에선 혁명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넘어 '전라도' 지역을 향한 자극적인 혐오 표현까지 더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전문가들은 이를 막기 위한 대응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국민적 인식 변화가 '동학농민혁명 세계화'의 첫 과제로 떠오르는 이유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은 "국민들 사이에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며 "이들 대부분이 혁명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정치적 이념에 매몰돼 혁명의 의미를 헐뜯고 깎아내리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후손들에게 온전히 전하기 위해선 국민 대다수가 올바른 인식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며 "전국에 널리 퍼져있는 동학농민혁명의 주요 유적지에 대한 지방자치단체의 적극적인 태도도 요구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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