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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농민군이 관군 700명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 곳입니다." 조선 후기 봉건 사회의 부패와 억압에 맞서 농민들이 일으킨 동학농민혁명. 이 거대한 혁명의 판도를 결정짓는 최대 격전지가 바로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에 위치한 황룡전적지다. 1894년 5월 27일 고창·영광·나주·무안·광산·장성 등 통합 혁명군이 이곳에 집결해 이학승이 이끄는 관군 700명과 맞서 격전을 벌였다. 처음에는 양총 등 신식 무기를 갖춘 관군에 맞선 불리한 상황 속에서 농민군들은 닭이나 작은 가축을 키울 때 사용하던 장태를 활용해 저항했다. 짚으로 가득 채워진 철죽(파란 대나무) 장태는 총알을 막아내는 방탄 효과를 발휘했고 이 기발한 전략을 통해 혁명군은 승리를 거둬 당시 관군이 보유하던 양총 100여 정 등 많은 신식 무기를 빼앗아 전주까지 진격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지난 11일 전남 장성 황룡전적지. 큰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평화로운 현장이었다. 이곳에는 당시 전투를 상징하는 높이 33m 폭 2.5m의 죽창 모양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기념탑 전면에는 양총으로 무장한 관군들과 장태와 죽창으로 저항하는 농민군들의 모습이 조각돼 있었다. 황룡전적지는 단순한 역사적 유적지가 아닌, 오늘날에도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매년 장성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이하 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동학농민혁명 황룡승전' 기념행사는 기념사업회 발족 초기에 40~50명이 참석하는 소규모 행사였지만, 군수, 도지사, 국회의원까지 참여하는 전남 전체의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동학농민혁명의 전국화를 위해선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지역의 혁명 인식을 크게 바꾸는데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정읍이나 고창과 같은 지역에 비해 혁명군의 참여 규모가 작았던 점은 장성 지역의 혁명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데 걸림돌이 됐다. 조복래 기념사업회 회장은 "예전에는 황룡전적지를 찾은 사람들이 볼 게 없으니 실망하고 돌아가는 게 보통이었다. 그래서 1997년도에 군의 소규모 지원을 받아 기념공원을 만들었는데 당시 대부분 사비가 들어갔고, 기념행사도 후원을 받아 진행했었다"고 말했다. 그는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이 된 전북 지역과 달리 타지역에서 혁명 정신을 더욱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행정적 지원의 확대가 필수적이다"며 "기념관 건립·교육 프로그램 개발·행사 지원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정부의 적극적인 참여가 이뤄진다면 전라도 지역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의 가치를 전파하고 미래 세대에게 혁명 정신을 계승할 수 있는 배경이 될 것이다"고 강조했다. <끝>
"누군가 한 줄만 남겨도 명예는 지켜지는 겁니다.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잊힐 뿐입니다." 올해로 130년을 맞이하는 동학농민혁명. 농민들의 피와 눈물로 써진 역사는 오늘날에도 연구와 논의가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당시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유족들도 고령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잊혀 가는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를 되살리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읍 각 지역의 동학농민혁명 등 역사 기록을 다룬 '면지' 집필에 힘쓰고 있는 곽형주(70) 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이사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최근 도내 고령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혁명에 대한 관심이 끊길 것을 우려하던 그는 "현재 혁명군의 후손들이 동학농민혁명에 관심을 갖는 마지막 세대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시간이 조금만 흘러도 혁명 정신의 계승은 끊길 것이다"며 "그전에 혁명군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기록을 남기고 있다"고 말했다. 곽형주 이사장은 "동학의 유족들마저도 혁명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모르고 있는 게 현실이다. 가슴 아픈 상처를 들춰보는 것이 힘들다는 건 이해하지만 남의 일처럼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며 "이 지역의 소위 리더라는 분들도 관심이 부족해 어려운 점이 많다"고 덧붙였다. 지난 1994년 정읍 동학농민혁명 기념행사에 참여한 그는 지역에 대한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단상에 농민 대표는 한 사람도 없고 전부 공무원 출신만 올라섰기 때문이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던 그는 "100주년 기념식에 농민 대표가 없다는 건 맞지 않다고 생각해 곧바로 항의했다"며 "그다음 행사부터 바로 개선됐지만 당시 이런 사소한 이야기도 적극적으로 할 수 없는 분위기였고 실제 행동에 옮기는 사람도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가 '기록 남기기'에 열중하게 된 것은 의병활동을 하던 의증조부의 억울한 죽음 때문이었다. 그는 "일제시대 때 외증조부께서 총에 맞아 돌아가시고 그의 아들이란 이유로 내 외종조부는 열다섯의 나이로 손톱을 대침으로 찔리는 고문을 당해 정신병자가 됐다"며 "아직도 무덤을 찾지 못했고 역사에 이름 석 자 남기지도 못했다. 결국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한편 정읍농고를 나와 농사일에 전념했던 그는 지난 2005년 11월 영원면지 '영원사람들의 삶과 역사' 발간 추진위원으로 활동하며 마을의 유래 및 땅 이름, 다양한 지역의 문화를 찾아 자료를 구하고 만들어내는 등 면지 발행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애착으로 영원을 포함한 정읍 대부분 지역의 혁명 기록을 남기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포악한 백성이 나라를 어지럽힌 반란을 일으킨 것' 과거 동학농민혁명은 이와 같은 의미에서 동학 '민란(民亂)'으로 불렸고, 역사 교과서에서도 '동학란'으로 지칭됐다. 1894년 갑오년 이래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역사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랜 기간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됐으며 이 시기 교육과정을 이수한 세대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대중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인식은 여기에 멈춰 서있다. 나아진 인식마저도 '농민들이 탐관오리에 저항해 공주까지 진출했다가 패전하고 해산했다'는 정도다. "시골에 저택이나 짓고 오직 저 혼자서 살길만 도모하면서 벼슬자리만 도적질하니 어찌 올바른 도리이겠는가."-동학농민군 '무장 포고문' 中 1894년 3월 21일, 고창의 무장기포지에서 일어난 봉기는 조선 후기 역사의 흐름을 바꾼 중요한 사건이었다. 억압받는 농민들이 일제히 봉기를 일으켜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을 알렸던 이곳은 지금도 역사적 가치를 지닌 유적지로 남아있다. 무장기포지는 넓은 논과 낮은 언덕으로 이뤄져 농민들이 모여 봉기를 논의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특히 전라도의 중심지에 있어 혁명의 영향력을 빠르게 확산하기에도 유리했다. 무장기포지는 단순히 고창 지역의 역사 유적이 아니라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한 획을 그은 상징적인 장소다. 따라서 무장기포지에 대한 관심과 참여는 전국적인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역사적 가치와 중요성에 비해 혁명의 현장들이 제대로 관리되고 보존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어, 무장기포지를 비롯한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에 대한 적극적인 관리와 관심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무장기포지는 현재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창 무장기포지 현장 입구에 들어서니 안내판과 그 옆,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놓여 있었다. 과거 이곳이 혁명군의 기포지였다는 것을 알리는 안내판들이다. 그 외 혁명의 잔재는 안내 없이는 알아보기 힘든 수준이었다. 혁명의 가치가 안내판 안에 갇혀있던 셈이다. 최근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제정을 기점으로 무장기포지의 역사적 가치를 두고 지역 주민의 움직임이 활발해졌지만 갖은 노력에도 무장기포지의 가치를 되살리는 데 한계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진윤식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전 이사장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민초들의 열망은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아직 혁명군 세력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있어 큰 관심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며 "혁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2차 동학농민혁명의 경우 외세에 저항한 만큼 정부와 지자체, 지역 주민, 민간 단체 등이 함께 무장기포지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일 수 있도록 유적지의 가치 향상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趙秉甲)을 효수하라." 1894년 1월 10일, 녹두장군 전봉준이 이끄는 1000여 명의 농민군이 전라 고부(현 정읍) 관아로 향했다. 그들의 목표는 탐관오리 고부 군수 조병갑을 처단하는 것이었다. 당시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만석보'를 이용해 수탈을 일삼는 조병갑의 폭정에 저항하다 곤장형에 처해 사망했고, 이 사건은 동학농민혁명의 기폭제가 됐다. 1893년 11월, 전봉준과 20여 명의 농민 지도자들이 고부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의 집에 모였다. 탐관오리를 처단하고 탐욕스러운 아전을 징벌하기 위해 혁명을 모의하는 자리였다. 이때 작성된 것이 바로 '사발통문'이다. 사발통문은 사건의 주동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사발 모양으로 둥글게 이름을 적어 넣은 통문이다. 각지에서 모인 농민군 대오를 정비한 지도자들은 대나무로 만든 죽창을 앞세우고 고부관아로 향했다. 1894년 1월이었다. 이들은 아전들을 끌어내 처벌하고 억울하게 갇힌 죄수들을 풀어줬으며 부당하게 거두어들인 양곡을 거둬 농민들에게 나눠줬다. 농민들은 수탈의 상징인 '만석보'도 허물어버렸다. 혁명의 시작을 알린 사발통문은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23년 5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지난달 23일 사발통문의 배경이 됐던 고부관아터를 찾았다. 혁명 당시 고부 군수 조병갑이 지내던 고부관아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고부관아가 있던 자리에는 초등학교(고부초등학교)가 세워졌다. 오늘날 이곳이 고부관아의 터임을 알려주는 것은 학교 입구 화단 위에 놓인 기념패와 고지도가 전부였다.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의 민족말살정책으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역사는 왜곡되고 지워졌다. 고부관아 역시 일제에 의해 모두 철거당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었던 전봉준의 혁명을 향한 첫 발자국이 외세에 의해 의도적으로 지워진 셈이다. 이후 고부관아터의 역사적 의미와 가치는 묻히고 말았다. 고부관아터의 역사적 장소성을 살리기 위해 나선 사람들이 있다. 고부관아복원추진위원회(위원장 김철모)다. "고부관아는 동학농민혁명의 봉화를 올린 역사적인 장소"라고 강조한 김철모 위원장은 "혁명의 정신을 후세에 온전히 알리기 위해선 이 자리에 고부관아터를 복원하거나 혁명의 시작을 기념할 수 있는 시설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고부관아터 복원 사업은 순탄치 않았다. 고부관아터 복원을 위해선 터 위에 자리 잡은 고부초등학교의 이전이 불가피하지만 고부초등학교 동문들과 일부 주민들이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고부관아터가 역사적 가치를 지닌 중요한 문화유산임은 틀림없지만 12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고부초등학교의 역사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결국 혁명의 가치와 학교의 역사가 저울 위에 놓인 상황에서 역사 유적을 복원함과 동시에 학교의 역사를 보존할 수 있는 해결책을 찾아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읍시 동학문화재과 담당자는 "과거 고부관아터 복원 사업은 여러 차례 시도됐지만 동문과 일부 주민의 반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었다"며 "하지만 최근 고부관아터의 역사적 가치에 대한 논의를 통해 주민 간 합의가 원활히 이뤄졌다. 이번 복원사업은 전보다 성공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立卽白山 座卽竹山). 서면 흰옷이 산을 이뤘고, 앉으면 죽창이 산을 이뤘다. 1894년 봄, 약 60만 명에 달하는 백성이 참여한 동학농민혁명은 이 땅의 민주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조선 말기 농민들의 억압된 삶과 봉건적 사회 질서에 대한 저항은 뜨거운 불꽃처럼 타올랐고, 단순히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넘어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당시 지속되던 '삼정의 문란'은 조선 후기 사회의 뿌리를 흔들었고 결국 동학농민혁명의 계기가 됐다. 사적인 원한으로 일어난 '반란'이 아니라 '혁명'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이 과거 반역으로 취급당했던 만큼 동학군의 후손들은 '역적의 자손'이라 불리며 손가락질받았다. 오늘날 혁명의 역사적 중요성이 인정됐지만 아직까지 이들에 대한 과도한 폄훼가 판을 치는 상황이다. 이에 본보는 동학농민혁명의 올바른 국민적 인식 확산과 지식의 저변 확대를 위해 기획을 마련했다. 이번 기획은 동학농민혁명이 한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거사임을 되새기며 올바른 인식을 함양하고, 각 지역 주요 유적지의 실태와 이를 둘러싼 현황을 살펴볼 예정이다. 구체적으로는 동학농민혁명의 시간적 순서에 따라 정읍(고부관아터)·고창(무장기포지)·부안(백산성)·정읍(황토현 전적지)·전남 장성(황룡 전적지)·전주(전주성)·김제(원평집강소)·완주(삼례2차봉기터)·충남 공주(우금치)·경북 예천(서정자들 전투지)·충남 태안(태안 교장바위)·경남 하동(하동 고성산)·강원 홍천(풍암리 전적지 자작고개)·전남 장흥(장흥 석대들)·충북 보은(보은 북실)과 황해 해주(해주성)를 차례대로 다룰 예정이다. 지난 달 22일 완산구 전주한옥마을에 위치한 동학혁명기념관. 이곳을 지나던 김 모 씨(40대·남)는 동학혁명기념관을 가리키며 "저걸 왜 '혁명'이라 부르는지 모르겠다"며 "사실 저건 나라를 혼란하게 만든 '반란', '반역'이라는 것을 알고있나"고 기자에게 질문했다. 그는 "지금처럼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는 문화를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근까지도 동학농민혁명에 관해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일본군이 국토를 유린할 수 있었던 것은 동학농민혁명 탓이다", "동학 폭동", "조선을 뒤엎은 반란군들이 어떻게 유공자로 모셔지냐" 등의 글이 게시되고 있다. 이처럼 동학농민혁명을 둘러싼 역사왜곡과 부정적 인식이 일부 국민들 사이에서 잔존하는 상황이다. 심지어 당시 지주계급이 그들의 자본을 지키기 위해 농민들을 부추겨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됐다는 '가짜뉴스'도 제기됐다. 이런 역사왜곡은 인터넷에 친숙한 젊은 세대에게 잘못된 역사관을 갖게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일부 커뮤니티에선 혁명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넘어 '전라도' 지역을 향한 자극적인 혐오 표현까지 더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전문가들은 이를 막기 위한 대응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국민적 인식 변화가 '동학농민혁명 세계화'의 첫 과제로 떠오르는 이유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은 "국민들 사이에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며 "이들 대부분이 혁명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정치적 이념에 매몰돼 혁명의 의미를 헐뜯고 깎아내리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후손들에게 온전히 전하기 위해선 국민 대다수가 올바른 인식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며 "전국에 널리 퍼져있는 동학농민혁명의 주요 유적지에 대한 지방자치단체의 적극적인 태도도 요구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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