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악한 백성이 나라를 어지럽힌 반란을 일으킨 것'
과거 동학농민혁명은 이와 같은 의미에서 동학 '민란(民亂)'으로 불렸고, 역사 교과서에서도 '동학란'으로 지칭됐다. 1894년 갑오년 이래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역사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랜 기간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됐으며 이 시기 교육과정을 이수한 세대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대중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인식은 여기에 멈춰 서있다. 나아진 인식마저도 '농민들이 탐관오리에 저항해 공주까지 진출했다가 패전하고 해산했다'는 정도다.
"시골에 저택이나 짓고 오직 저 혼자서 살길만 도모하면서 벼슬자리만 도적질하니 어찌 올바른 도리이겠는가."-동학농민군 '무장 포고문' 中
1894년 3월 21일, 고창의 무장기포지에서 일어난 봉기는 조선 후기 역사의 흐름을 바꾼 중요한 사건이었다. 억압받는 농민들이 일제히 봉기를 일으켜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을 알렸던 이곳은 지금도 역사적 가치를 지닌 유적지로 남아있다. 무장기포지는 넓은 논과 낮은 언덕으로 이뤄져 농민들이 모여 봉기를 논의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특히 전라도의 중심지에 있어 혁명의 영향력을 빠르게 확산하기에도 유리했다.
무장기포지는 단순히 고창 지역의 역사 유적이 아니라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한 획을 그은 상징적인 장소다. 따라서 무장기포지에 대한 관심과 참여는 전국적인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역사적 가치와 중요성에 비해 혁명의 현장들이 제대로 관리되고 보존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어, 무장기포지를 비롯한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에 대한 적극적인 관리와 관심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무장기포지는 현재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창 무장기포지 현장 입구에 들어서니 안내판과 그 옆,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놓여 있었다. 과거 이곳이 혁명군의 기포지였다는 것을 알리는 안내판들이다. 그 외 혁명의 잔재는 안내 없이는 알아보기 힘든 수준이었다. 혁명의 가치가 안내판 안에 갇혀있던 셈이다. 최근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제정을 기점으로 무장기포지의 역사적 가치를 두고 지역 주민의 움직임이 활발해졌지만 갖은 노력에도 무장기포지의 가치를 되살리는 데 한계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진윤식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전 이사장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민초들의 열망은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아직 혁명군 세력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있어 큰 관심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며 "혁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2차 동학농민혁명의 경우 외세에 저항한 만큼 정부와 지자체, 지역 주민, 민간 단체 등이 함께 무장기포지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일 수 있도록 유적지의 가치 향상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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