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의 대표 관광지인 전주 한옥마을 인근에 위치한 전주 풍남문은 조선 시대 전라감영의 소재지였던 전주를 둘러싼 성곽의 남쪽 출입문으로 성벽이 헐린 후에도 유일하게 남아 있다. 전라감영은 이곳에서 걸어서 7분 거리에 있다.
전라도의 심장부였던 전라감영은 경상감영과 충청감영과는 달리 한 번도 이동을 하지 않았고 평양감영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고 한다.
△전라감사 집무실 선화당과 250년 회화나무
전라감영 입구에는 ‘약무호남(若無湖南) 시무국가(是無國家)’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로 진을 옮긴 후 임금께 올리는 장계에 썼던 이 말의 뜻은 전라도는 나라의 울타리이므로 전라도가 없으면 나라가 없다는 말이다.
전라도가 우리나라에서 어떤 지역이었는지 알려주는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는 비석이다.
내삼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면 전라감사가 집무실로 쓰던 선화당이 정면으로 보인다. 선화당이란 왕명을 받들어 교화를 펼친다는 뜻이니 이곳은 전라감영의 심장이자 조정의 파견 관리소였다. 감사는 이곳에서 행정·사법·군사의 업무를 보았다.
선화당 앞 섬돌 아래 왼쪽(동편)에는 가석이 있고 오른쪽(서편)에는 폐석이 자리하고 있다. 가석은 죄인들에게 잘못을 뉘우치게 하는 표석이고 폐석은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는 신문고 역할을 한 표석이다.
선화당 오른쪽 방에는 전주 역사박물관에서 고증한 전라감영의 옛 모습이 디지털 영상과 배우의 음성으로 복원돼 있다.
특히 이 곳 선화당에는 회화나무가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라감영이 생긴 이래 지금까지 현존하는 유일한 흔적이다. 수령이 250년 된 이 나무는 전라감영의 역사와 함께해 온 덕분에 복원 과정에서 선화당의 위치를 확인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82년에는 보호수로 지정돼 꾸준히 관리 받고 있다.
전라감영은 '야경 맛집'으로 통하는데, 전주에서 저녁에 산책하기 좋은 곳으로 떠오르고 있다. 하루해가 저문 저녁에는 감영 담벼락을 따라 걸으면 은은하게 빛나는 조명과 함께 운치 있는 한옥의 멋을 느낄 수 있다. 한옥마을과도 가까워 걸어서 가볍게 다녀오기 좋은데, 근처의 음식점과 카페에 앉아 '전라감영 뷰'를 즐길 수도 있다.
△전라남북도와 제주도까지 총괄했던 ‘전라감영’
전라감영은 전라도를 총괄하는 지방통치관서로 조선왕조 500여 년 내내 전주에 자리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서울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만들기 위해 전국을 8도로 나눠 각각 감영을 설치했다. 8도 관찰사 아래 목·군·현이라는 요즘의 시·군 체제를 갖추기도 했다.
관찰사는 종2품으로 행정·사법·군사권을 가졌으며, 2년 임기 동안 관할 지역을 순찰하던 제도인 순력체제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감영에 머물면서 다스리던 유영체제로 바뀌었다. 전주성 내 중앙동 옛 도청사와 경찰청 자리에 한강 이남에서 최대의 전라감영을 설치하고 지금의 전라남북도와 제주도까지 호남지역을 전라감사가 총괄하는 행정기관이었다.
전라감영은 감사가 집무하는 포정문, 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선화당, 감사의 주거 공간인 연신당, 지방관아에 있던 안채 내아, 감사가 친히 나가 농정을 관람하던 관풍각, 내삼문 등 40여 채의 웅장한 규모였다.
당시 전주는 행정의 중심지로서뿐 아니라 19세기 말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 자치기구인 집강소의 총본부인 대도소가 설치된 자리로도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큰 곳이다.
그 밖에도 부채를 제작해 임금에게 진상했던 선자청과 나라에 공물로 바칠 종이를 만들던 지소, 책을 만들던 인출 방과 함께 대사습놀이와 관련된 통인청도 있었다.
이렇듯 전주는 조선 500년 동안 전라도 전체를 다스리는 관찰사가 머물렀던 곳으로 총체적인 문화의 중심지가 바로 전주 중앙동에 위치했던 전라감영이었다.
그러나 1896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도청 행정업무 공간으로 사용됐다가 1910년 경술국치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도청(道廳)으로 사용됐다. 중심 건물인 선화당은 도청사의 부속 건물 용도로 사용되다가 한국전쟁 시기인 1951년에 화재로 소실돼 옛 모습이 자취를 감추게 됐다.
지난 2005년 전북도청이 신도심으로 이전하면서 전라감영 복원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전라감영 복원사업은 10여년 간의 논의 끝에 지난 2011년 각계 인사들로 구성된 ‘전라감영 복원 통합추진위원회’에서 복원하기로 최종 결정됐으며 지난 2015년부터 철거작업이 진행되며 본격화 됐다.
△‘전북 자존시대 회복 의미’ 갖는 전라감영 복원
전주시는 104억 원의 예산을 들여 지난 2020년 전라감영 동편 부지를 복원한 1단계 사업을 마쳤다.
전라감영 복원은 40여년 계속된 낙후와 침체의 어두운 질곡에서 벗어나 전라감영의 옛 영광을 바탕으로 전라북도 자존시대를 회복해 전북의 미래를 새롭게 변화시켜야 한다는 절박함이 담겨 있다.
전주시는 2030년까지 총사업비 1200억 원을 투입해 감영의 나머지 서편과 남편 부지를 확보해 전체 복원에 마침표를 찍는다는 계획이다. 이후 시는 전북도로부터 도유지인 서편부지를 확보해 광장으로 정비하고 지난해부터 발굴 작업과 3D 스캔을 진행하는 등 전체 복원의 물꼬를 텄다.
하지만 남편 부지는 국유지인 전주 완산경찰서 용지와 사유지가 혼재해 있어 확보를 위한 후속 절차는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전라감영 전체 복원의 최대 관건인 완산경찰서 이전은 지난 2009년 전라감영 복원 추진위원회가 구성된 이후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그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됐다.
전주시도 전라감영 전체 복원 계획이 가시화된 직후, 완산경찰서와 구체적 논의를 시도 했지만 이전할 부지가 확정되지 않으면서 계획은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부지와 예산 확보는 전라감영 전체 복원을 위해 가장 먼저 해결되어야 할 과제지만 이들 중 어느 쪽도 만만한 과제가 아니다. 예산 확보도 국비 지원을 추진하고 있지만 국가지정문화재나 사적으로 지정되지 않는 한 어려운 일이다. 전라감영은 현재 도지정문화재로 등록돼 있기 때문이다. 실제 시는 지난 전라감영 동편 복원 사업비 모두를 도·시비로 충당했다.
그야말로 영화롭던 조선시대 3대 도시의 옛 성세가 완전 복원되기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처음 실현된 곳
전라감영은 동학농민군과 조선관군의 전주화약을 끌어낸 곳이다. 130년 전인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은 조선정부에 폐정개혁안을 제시했고, 이를 수용한 정부는 전라감사 김학진을 통해 전봉준과 선화당에서 전주화약을 맺었다.
이후 전라도 일대에 동학농민군 자치조직인 집강소를 설치했고, 이를 총체적으로 관리·감독하기 위한 대도소가 전라감사 집무실인 선화당에 세워졌다. 선화당이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최초로 실현된 상징적인 곳이 된 것이다.
전주화약이후 동학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했고 관군은 이들의 안전을 보장했지만 일본이 조선 궁궐을 침범하고 이를 이유로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농민들은 일본군 타도를 내세우며 재봉기하게 됐다.
동학농민군의 세력은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도, 그리고 경상북도 일부 지역에서 맹위를 떨쳤다. 당시 “앉으면 죽산(竹山)이요, 서면 백산(白山)이라”(죽창을 든 동학농민군들이 앉으면 죽산이 되고 흰옷 입은 동학농민군들이 일어서면 백산이 됐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동학 농민군의 수는 최대 20만에 달했다.
하지만 동학농민군은 수적으로만 우세할 뿐 훈련을 받은 군인도 아니었고, 병기도 원시적이어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농민군은 10만 부대로 공주성을 포위하고 대공격전을 전개하다 패퇴하고, 다시 공주 부근의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해 후퇴하게 된다.
이후 태인 전투에서도 패배해 전봉준이 잡혀 서울로 압송되고, 이듬해 처형됐다. 비록 동학 농민 운동이 좌절됐지만 전주화약을 계기로 갑오개혁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역사적 큰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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