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건축의 선구자 김인호가 남긴 현대건축의 진수
일제강점기와 해방, 6, 25동란의 폐허를 지나고서 60년대 조국 근대화의 시기에 비로소 근대건축을, 80년대 올림픽을 맞아서 우리의 현대건축을 세우게 되었을 것이다. 급변의 시간 속에서 겨우 남겨진 근대건축의 가치를 소중히 생각하는 시대가 되었다.
대구건축의 선구자 김인호는 현대건축과 아울러 불국사 조영 계획, 영남제일문, 경주화랑 연수원등을 설계하며 전통건축 고찰 논문들을 남긴 대학교수(청구대학)였다. 그의 건축에는 전통과 지역성에 대한 실험적 표현들이 내재하며 지나치게 세련되거나 일률적인 설계로 정형화하지 않았다. ‘한강 이남에서는 대구의 건축 수준이 높고 가장 활동적이었다'라고 회자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바로 후당 김인호 선생(대아건축)이 활동했던 그 시절이었다. 대구의 건축가이면서도 서울 잠실야구장을 비롯, 대전 충무체육관, 원주 치악체육관 등 전국적으로 작품활동을 하였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즈음에 이곳 시설들을 설계한 별들이 연이어서 떨어졌다. ‘잠실종합경기장’ 설계자 김수근은 86년 6월(55세)에, ‘올림픽 기념조형물’ 설계자 김중업은 88년 5월(66세)에, ‘잠실야구장’ 설계자 김인호는 88년 7월(56세)에 타계하였지만 짧은 생에 굵은 작품들을 남겼다.
30여 년을 시민과 함께하고 있는 ‘대구문화예술회관’, 증개축하여 ‘대구 콘서트하우스’로 재탄생한 과거 ‘대구시민회관’, 시대적 흐름에 따라 사라질지도 모를 ‘경북체육관(현, 대구체육관)’ 건축을 조명해 본다.
◆대구문화예술회관- 30년 세월과 공간의 건축
서울 세종문화회관(1978년)을 시작으로 80년대부터 각 지역 도시에 건립된 문화예술회관은 그 도시 위상을 나타내는 대표적 건축이었다. 1990년에 건립된 대구문화예술회관은 30년 동안 시민들과 함께하고 있는 도시의 안식처이다.
광장 마당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전시동, 왼편으로 공연 동이 낮은 산자락처럼 펼쳐진다. 육각형 연속패턴 평면의 전시동은 화강석 바위처럼 중첩되어 이어진다. 전시동 로비의 조경 공간은 행사 시 다목적공간으로 바뀌었고 전시장 아래위 트인 공간은 탱화 등 대형작품을 배려했다 한다.
당시의 설계개요에서 말하고 있다. 전시동 평면 흐름은 농악의 상모 이미지와 외부 공간 축을 중심으로 한국 전통 아리랑 흐름으로 구성, 외양은 대구의 상징 목련 꽃잎을, 공연 동 지붕은 박사(薄紗) 고깔의 승무를 연상하는 디자인이라 말한다. 당시의 현상공모 설계 공공 건축들은 전통적 요소의 건축 표현이 필수적이라 할 만큼 한국적 주체사상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행정관서 발주자의 분위기이기도 했고 다양한 건축 어휘를 경험하지 못한 과도기적 건축 표현이었을 것이다.
김인호 선생은 공사 기간 중 작고하여 마지막 유작이 되었다. 광장 마당은 대구예술인 장(제2대 대구 예총회장)을 치르고 그를 떠나보내는 마당이 되었다. 대구문화예술회관 건립 30주년을 기념하는 ‘후당 김인호 건축전(2020년 11월)’이 이곳에서 열렸고, 선생의 뜻을 기려 창의적 젊은 건축가를 선정하는 ‘후당건축상’이 27년을 맞고 있다.
◆대구시민회관의 재탄생 (현, 대구 콘서트하우스)
건축을 ‘시대의 거울’이라고 말한다면, 바로 시민회관 건축은 그 시대의 문화 경제 정치가 담긴 건축이었다. 특히 대구역과 광장에 인접하여 근현대 대구의 도시변천사를 지켜본 건축의 장소였다. 시민회관은 문화예술 행사는 물론 국경일 기념식, 시상식, 반공 궐기대회, 미인선발대회까지 열리던 다목적 건축이었고, 부속건물에는 문화예술단체 시민단체들이 한곳에 모여 있었다. 바로 이곳은 ‘대구방송국’과 ‘KG’홀이 있었던 사라진 기억의 공간이었다.
1975년 건립된 대구시민회관은 대구역 서편, 도시 정면을 향한 웅장한 처마와 지붕 곡선, 열주(列柱), 주두(柱頭) 등 전통적 요소를 세련되게 표현한 건축이다. 세워진 지 38년 후. 시민회관은 4여 년의 증개축 공사를 마치고 2013년 콘서트 전문 홀로 재개관했다. 시대적 노후 건축을 철거치 않고 건축적 가치를 보전하는 방법으로 과거 건축의 디테일과 구조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며 첨단 콘서트홀로 재탄생했다.
과거 시민회관은 다목적 공연장으로 전면 무대막이 설치되고 프로시니엄 아치가 무대와 객석을 구분 짓는 건축방식이었다. 콘서트하우스는 최고의 음향을 위해 무대와 객석이 하나의 공간으로 통합된 슈박스 방식으로 대구가 자랑하는 시립오케스트라의 주 무대인 콘서트홀로 변신하였다.
대구예술발전소, 대구문학관, 대구근대역사관, 창조경제캠퍼스‘와 함께 도시 근대건축의 재생은 근대 골목과 건축 문화유산으로 이어져서 도시문화의 깊이를 나타내는 척도가 되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곳은 다행히도 도시의 여백을 존중하는 광장 공간이 중심이다. 공연이 있는 밤이면 내부 홀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으로 처마 곡선 실루엣이 우아하며 문화예술의 불빛이 도심 광장을 밝히는 밤이 아름다운 건축이다.
◆경북체육관 (현, 대구체육관)- 재생과 철거의 갈림길
1971년 개관 당시의 ’경북체육관‘은 1981년 행정 개편으로 ’대구체육관‘이 되었고, 당시 공사비(37억)의 70%는 시민 성금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과거 오리온스 농구팀을 거쳐 지금은 한국가스공사 페가수스 농구팀의 홈구장이다.
1966년 전국현상공모 당선작으로 당시 대형체육관 설계는 고난도 첨단구조의 건축적 실험이요 모험이었다. 양쪽 초대형 기둥이 지탱하는 지붕구조의 전체적 외형은 신라 화랑의 투구 형상으로 의미화한다. 동서남북 출입구는 사찰의 일주문을, 저층부 노출 구조는 대들보와 서까래 추녀 곡선의 한국 전통 조형으로 형상화하고 하였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상승하는 경사면과 지붕 수평 수직 구성은 기운생동(氣運生動) 하는 힘의 건축이다. 특히 체육관 내부 천장을 구성하는 3차원적 기하학 곡선은 시간을 초월한 건축미학이다.
당시 공사 현장의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거대한 상부구조를 받치고 있었던 마지막 공사가설 기둥 제거 시에는 붕괴 위험 우려에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그때 선생이 직접 나섰다. 대형구조물이 제자리를 찾을 때 내는 굉음과 공포의 순간을 몸소 감당하며 설계자의 책임을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50년을 넘긴 체육관은 기능과 구조의 노후화, 교통 접근성으로 재생이냐? 철거냐? 갈림길에 서 있다. 바로인근 구, 경상북도청(현, 대구시 산격청사)과 아울러 향후 보존과 지속 가능 건축을 긍정적으로 연구해야 할 시점이다.
최상대 전,대구경북건축가협회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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