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수원 밖에서도 유명해진 화성행궁의 바로 옆엔 행궁보다 덜 알려졌지만 더 중요한 건축물이 있다. 235년 전 화성행궁을 건립한 정조(조선 22대 임금, 1776~1800년 재위)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어진(임금의 초상화)을 모신 '화령전(사적 115호,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다. 임금의 어진을 봉안한 전각을 '영전'이라 부르는데 지금은 전주한옥마을 근처의 경기전(태조 어진 봉안)과 이 화령전만 남았다.
현재의 화성행궁과 수원화성이 전국 방문객을 끌어모으고, 과거엔 정2품(지금의 장·차관 또는 도지사) 유수가 머물고 집무하는 유수부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화령전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며 위상을 잃어가던 수원화성에 계속 순조와 헌종, 철종, 고종 등 모든 조선 임금들이 발길을 이어간 것도 화령전 때문이었다. 융건릉 능행차 길에 오른 임금들이 참배에 그치지 않고 매번 화령전을 찾아가 다시 한번 정조에게 잔과 절을 올린 작헌례(酌獻禮)를 치른 것이다.
화령전은 조선시대 왕실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며 창건 당시 원형이 대부분 남아 있다는 평가를 받아 5년 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2035호)로 지정됐을만큼 건축적 가치가 뛰어나다. 정부 정책에 따라 정조의 어진이 잠시 화령전을 떠나고, 병원·행사장·사무실 등 엉뚱한 목적에 쓰여 화령전이 낡거나 훼손될 때마다 수원시민들이 십시일반 성금과 힘을 모아 건물을 수리하는 등 화령전 지킴이를 자처한 것도 이 때문이다.
수원시화성사업소 오선화 학예사는 "수원사람들에게 화령전은 곧 정조"라며 "그가 일궈낸 최고의 걸작 수원화성에 정조의 어진이 머물렀고, 지금도 머물고 있는 공간이 화령전이기에 건축물 그 이상의 의미가 부여된다"고 화령전을 설명했다. 화성행궁을 방문한다면 화령전을 꼭 찾아야 하는 이유다.
△역대 임금 모두 찾고, 백성에도 경사였던 화령전
화령전은 정조 승하 3개월 후 그의 할머니인 정순왕후의 명에 따라 지어졌다. 당시 정조의 장례(국장) 절차를 총괄한 총호사 이시수의 청을 정순왕후가 받아들였다. 정조는 생전에 부친인 사도세자를 가까이서 지켜보려고 자신의 초상화를 현륭원에 뒀는데, 나중에 정조의 묘를 현륭원 옆에 조성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정조 어진을 다른 장소로 옮겨야 했다. 정순왕후가 별도의 전각을 지어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도록 하면서 1801년 4월 29일 화령전이 세워졌다. 건립에 참여한 400명 이상 각종 장인들은 쌀이나 포목 등의 상을 받았다.
처음 화령전에서 작헌례가 치러진 건 1804년이다. 11살에 정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순조가 15살 때 첫 능행차에 나서며 아버지의 어진을 찾아 잔과 절을 올렸다. 이후 왕세자까지 데리고 화령전을 방문하는 등 순조는 9차례나 돌아가신 아버지 앞에서 예를 갖췄다. 그 뒤로는 헌종이 1843·1846년, 철종은 1852·1855·1860년, 고종도 1868·1870년 직접 화령전을 찾는 등 정조 이후 모든 조선시대 임금들의 능침(임금이나 왕후의 무덤) 친제(임금이 직접 지내는 제사)가 이어졌다.
이렇게 융건릉 능행차와 화령전 작헌례 등을 목적으로 수원화성을 방문할 때마다 임금들은 화성행궁에서 적어도 이틀을 묵었는데, 이는 지역 백성들에게도 경사였다. 임금이 대궐 밖을 나서는 '행행' 자체가 백성들의 요행을 뜻하기도 하는만큼 이 때마다 지역 백성들에게 여러 혜택이 내려졌다.
△바로 인접한 이안청…온돌로 합자와 익실 관리
화령전과 같은 영전 건물은 조선시대 절기마다 선왕의 제사를 지내던 곳이어서 건축에도 각별한 격식을 갖췄는데, 화령전은 그 건축적 제도를 계승하며 고유한 특색까지 갖춘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2019년 제2035호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된 화령전은 1801년 건립 당시 정전(운한각)과 복도각, 이안청으로 구성되는 조선시대 영전 건물들의 건축제도 원형 그대를 유지하고 있다. 동시에 정전 실내에선 중앙에 어진을 봉안한 합자와 좌우에 갖춰진 익실의 구조를 갖추는 등 다른 영전에서 보기 어려운 특색을 지니고 있다.
건립 당시 화령전은 정전을 중심으로 이안청과 복도각이 연결돼 있고 정전 마당엔 내삼문에서 정전 월대까지 어로가 놓인 형태로 지어졌다. 마당 북쪽 담장에 난 동문을 나서면 재실이 있고, 동문과 정전 월대 사이에도 어로가 깔려 임금이 작헌례를 거행할 때의 동선을 드러낸다. 남쪽 서문을 나가면 위치해 있는 향대청과 전사청은 제례 때마다 물과 향, 제수 등 제사 준비에 쓰인 건물이다.
이안청은 정전을 수리하거나 그 밖에 변고가 있을 때 정전의 어진과 기타 서책, 기물 등을 임시로 옮겨놓기 위한 용도로 마련됐다. 정전 곁에 이안청을 두는 방식은 조선초기 다른 영전에서도 볼 수 있지만, 화령전의 이안청은 전주 경기전 등과 같이 담장 너머 별도의 구획된 영역에 위치한 게 아니라 복도각을 사이에 두고 정전과 이안청을 직접 근접하게 연결하는 방식을 갖추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여러 영전 가운데 화령전에서 처음 나타난 사례다.
화령전은 정전 건물 내부 평면 역시 다른 영전에서 보기 드문 형태를 나타내는데, 중앙에 합자를 두는 건 전주 경기전 등에서도 볼 수 있지만 좌우에 익실을 마련해 서책이나 관련 기물을 보관한 것은 색다른 특징이다. 특히 중앙 합자는 물론 좌우 익실의 바닥에 온돌을 설치해 5일마다 불을 넣어 습기를 제거하도록 했다. 이 온돌은 1872년(고종 9년) 왕명에 의해 마루로 고쳐졌으나, 건물 좌우 측면과 후면의 아궁이는 존치해 당시 정전에 온돌이 쓰인 사실은 지금도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
△"화령전 지키는 첫걸음, 가치 제대로 아는 것"
이처럼 수원화성의 역사적 가치를 지켜내며 건축물로서의 가치도 드높인 화령전은 숱한 외력에 자칫 훼손될 뻔한 위기를 한 두번 겪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수원시민들이 화령전을 직접 지켜냈다. 화령전 안에 처음 봉안된 정조의 어진이 1908년 당시 정부 정책에 따라 덕수궁으로 옮겨진 이후 불에 타 사라지고, 다시 그린 어진을 2004년 모시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었다.
정조의 어진이 떠난 화령전을 가장 먼저 멋대로 사용한 건 일제였다. 자신들의 근대문명 선전을 위한 병원(자혜의원)을 1910년 화령전에서 운영했다. 1915년엔 작약회란 조직이 화령전을 꽃놀이 장소로 사용했고 곡예단과 기생들의 공연 장소, 물건 판매장으로 이후 쓰였으며 나중엔 영화 상영과 피로연 등 각종 행사장 목적에도 활용됐다.
그렇게 임금의 어진을 모시던 화령전이 엉뚱한 목적으로 쓰이며 건물이 낡고 일부 훼손되기 시작하자 보다못한 수원시민들이 직접 화령전 지키기에 나섰다. 보수 규모는 작았으나 1934년 수원 유지들로 이뤄진 수원보승회가 건물을 직접 수리했고, 1936년엔 추녀와 지붕을 고쳤는데 당시 수리 공사를 위한 도면도 남아 있다. 그럼에도 해방 후엔 화령전이 무당의 숙소로, 마당은 밭으로 쓰이자 1949년엔 주변 신풍동 마을 주민들까지 팔을 걷어붙였다. 당시엔 수원시와 화성군의 예산 및 자재 지원도 이뤄졌고 지역 대목수들도 공사를 도왔다. 그럼에도 다른 목적으로 활용된 화령전은 1963년에야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며 보존 근거가 마련됐으며, 1975년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수원성 복원보수정화사업에 따른 대대적 보수가 진행됐다. 이후 1992년 표준영정으로 그려진 정조의 어진이 80여 년만에 다시 화령전에 봉안됐고, 이후 2004년 다시 그려진 어진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화령전의 높은 가치를 지키는 첫걸음은 그 가치를 제대로 알고 기억하는 것이다. 5년 전 화령전의 보물 지정을 가장 반긴 것도 다름아닌 시민들이었다. 과거 화령전 수직관원들이 5일마다 어진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 수원유수가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한번 향을 피워 어진을 보살폈던 것처럼 수원시민은 물론 국민들이 다함께 정조가 영원히 머물 화령전을 지켜야 할 것이다.
/경인일보=김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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