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에는 '목'의 종류가 많다. 목이라고 하는 것이 개인적인 발성의 기교를 가리키기 때문에, 임방울은 임방울 나름의 목이 있고, 김연수는 김연수 나름의 목이 있다.
그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여러 가지, 아니 수십 가지의 목을 한 사람이 구사한다. 그러기 때문에 판소리에는 수많은 목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목이 만들어지고, 이름붙여지는 방식이 매우 재미있다. 내가 들은 목의 이름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는 이슬털이목을 들 수 있다. 이슬털이목에 대해 얘기해 준 사람은 박영선이라는 분이었다.
박영선 씨는 젊어서부터 우리 음악을 좋아하여 평생을 그 주변에서 보낸 사람이다.
어느 해던가 전주대사습대회이 열리고 있던 경연장에서 박영선씨가 나를 부르더니, "최교수. 이슬털이목이라고 아시오?"하는 것이었다.
이슬털이목이라니, 너무 예쁜 이름이었다. 나는 호기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말이요, 신영채(1915-1955?)가 잘 쓰던 목인디, '으 으 으 으으으으으으' 이렇게 허는 것이오."하는 것이었다.
소리를 천천히 단계적으로 위로 올렸다가, 잘게 꺾어 주루룩 내리는 목이었다. "이게 있잖소. 거 여름날 새벽에 논에 갈 때, 나락에 이슬이 잔뜩 맺혀 있다가, 사람이 지나가면 바지 가랭이에 걸려서 능청거리다가 이슬이 주루룩 떨어지잖소. 그거, 바로 그것을 흉내낸 목이오. 참 좋은디, 요새는 거, 이런 목을 쓰는 사람이 없단 말여." 그의 얼굴에는 아쉬운 빛이 역력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처음에는 그 아름다운 이름에 감탄했지만, 다음에는 민중들의 창조의 방식 때문에 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리꾼들은 늘 생활 주변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그것을 음악적으로 형상화했다.
'방울목'·'튀는목'·'너는목'·'줍는목'·'펴는목' 등등도 그것이 어떤 것이건 간에 민중들의 생활과 활동의 내용이지 않은가. 아마 신영채는 어느 늦은 여름날 새벽, 논길을 가고 있었으리라. 잔뜩 내린 이슬에 바지가랭이를 적시며. 처음에는 짜증이 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자기 바지가랭이에 걸려 능청거리는 벼 잎에서 주루루룩 떨어지는 이슬을 보았을 것이다.
순간 그 아름다움에 도취되고, 그는 그것을 음악으로, 그러니까 '이슬털이목'으로 형상화했으리라. 사실 모든 예술은 이렇듯이 생활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그러기에 서양음악은 서양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당연히 그들의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것을 생활과 문화가 다른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고, 잘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최동현(판소리연구가, 군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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