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전주 객사에 가려고 시내버스를 탔다. 영하 20도를 웃도는 한파에 승객들은 버스에 타자마자 파리처럼 손을 비벼댔다. 꽝꽝 얼어붙은 도로 위에서 눈 이불을 뒤집어쓰고 기어가는 차들은 어쩐지 더 작아보였다. 라디오 뉴스에선 자동차 엔진이 동파돼 곤혹스러웠다는 한 시민의 인터뷰가 들려왔다. 몇몇 승객들은 토할 듯이 기침을 하고 나는 멍하니 차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옆 차선에 대기하고 있는 '닭장 트럭'이 눈에 띄었다.
나는 닭장 트럭을 볼 때마다 매번 경이로운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저 좁은 칸에 어떻게 저렇게 많은 닭을 넣을 수 있는지, 과연 저 닭들은 무사한지 말이다. 항상 발 디딜 틈 없이 닭과 오리를 꽉꽉 채워 무법자처럼 달리던 트럭이 웬일인지 달랑 오리 두 마리만 싣고 있었다. AI의 여파로 애써 키워온 새끼들을 묻고 온 것이었는지 단순히 운반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오랜만에 빈집에 앉은 오리를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몇 십 마리씩 우겨넣은 다른 때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도 없어서 불안하고 초조해하는 눈빛이었다. 태어난 지 보름 쯤 됐을 새끼오리였다. 잠이 오는지 눈을 끔벅거리다가 멍하니 아스팔트 위를 쳐다보았다. 사실 무엇을 보고 있다기보다 견디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작은 발에 얼마나 힘을 주고 있는지 트럭 기사의 급정지에도 아랑곳 않고 잘 버티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자 트럭은 앞으로 거세게 돌진했다. 오리들은 휘청거리다가 중심을 잡고 다시 발에 꾹 힘을 줬다. 그 모습이 너무 단정해서 순간 울컥할 뻔 했다. 온몸으로 칼바람을 맞으면서도 넘어지지 않으려는 어린 오리의 모습이 나보다 나았다. 그렇게 오리의 짧은 생이 지나가고 나는 닭장 같은 버스 안에서 스물 네 해를 맞았다.
객사의 한 카페에서 졸업을 앞둔 친구를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동안 나는 우리가 얼마나 오리와 닮았는지 생각했다. 친구는 얼마 전 대한항공 스튜어디스에 취직했다는 자기 친구 이야기, 간호사로 일하는 동창이 한 달에 백만 원짜리 적금을 든다는 이야기, 누구는 벌써 차를 샀더라 하는 남의 이야기를 모범 사례로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자기는 아직 꿈이 뭔지 모르겠다고, 졸업이 코앞인데 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지 한심하다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친구의 중대한 고민을 듣자 나는 최근 트위터에서 최다 리트윗(retweet)된 말귀 하나가 떠올랐다.
"먼 훗날 열심히 살아가지 않은 오늘을 후회하게 될 것을 안다. 그런데 지금 당장 뭘 해야 훗날 후회하지 않을지를 도무지 모르겠다."
이런 글에 동요하는 많은 20대는 철이 없는 걸까, 순진한 걸까? 마침 내가 좋아하는 칼럼기자는 이런 글을 썼다. "꾸짖는 꼰대 보다는 위로하는 꼰대의 그 막연한 연민을 비웃어라. 그건 독이다. 상수동에 사는 사람들을 상수동 주민이라는 말로 싸잡아 그들을 둘러싼 팩트를 인식하는 건 가능하지만, 상수동 주민이라는 말이 상수동에 사는 사람들의 개별적인 삶을 대변해주지는 않는다."고. 그렇다. 우리는 더 이상 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다시 묻거나 대학 교육의 실상을 따져선 안 된다. 꿈이라니, 희망이라니, 6학년 졸업할 때 타임캡슐에 넣어 봉한 지 오래다.
하지만 나는 이런 말들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길 바란다. 나는 내 친구가 더 철없고 어리석어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세상한테 지면서 이기길 바란다. 닭장 속 오리도 언젠가 울타리를 박차고 나와 뒤뚱뒤뚱 쏘다니고 꽥꽥거리다가 청둥오리처럼 남쪽 하늘을 유유히 나는 어처구니없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 임주아 (우석대신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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