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화(朴東和·1911~1978)는 전라남도 영암 출신의 극작가이다. 그러나 그의 장례는 전북 최초의 문화인장으로 치러졌다. 그만치 그는 도내에서 존경받는 예술인이었다. 당초 계모 슬하에서 자라난 그는 누나를 엄마로 알고 많이 따랐다고 한다. 한국에서 계모가 전처 자식을 홀대하는 모습이야 흔한 축에 들었으니, 그의 어린 가슴에도 깊은 내상이 자리했을 것이다. 그의 작품 도처에서 젊은 후처가 등장하는 광경을 두고 굳이 개인사적 사연을 들이밀며 확인하고 싶지 않으나, 작가 개인으로서는 내면에 똬리를 튼 채 사라지지 않는 어릴 적 상처를 어른이 되어서도 씻어내기 힘들었으리라.
그는 중앙불교전문학교를 다니면서 서정주, 서항석 등과 교류하였다. 모두 불경 공부는 뒤로 하고, 돈도 안 되는 문학놀음에 청춘을 허비한 모양이다. 그만치 1930년대가 식민지 청년들에게 가져다 준 절망의 상처는 컸고, 그들은 비참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의지처로 문학판을 기웃거린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살을 흠낸 비참한 상황은 문학의 자양으로 작용하였다. 그들이 훗날 한국문학의 선편을 장악한 것만 보아도, 젊은 날의 방황은 호사가들의 치기라고 무시할 수 없다.
박동화는 1937년 목포에서 발행되던 잡지 '호남평론'의 편집국장으로 있었다. 그러다가 1942년 일경에게 원고를 압수당하고 국경 근처로 달아났다. 그로서는 일경을 보지 않을 자유를 얻고자 감행한 모험이었을 터이나, 신의주에서의 삶은 고생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겨우 지역신문 압강일보 기자로 호구하였고, 무작정 그를 따라나선 여인은 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끼니를 이었다. 그는 자신을 쫓아 먼 곳까지 와서 잉태한 그 여인에게 극진한 정성을 쏟아 신실한 사랑을 보였다. 그들의 순애보는 그가 가는 곳마다 감동적인 전설로 퍼졌다.
그는 해방을 맞아 서울에서 '시민극단'을 창단하는 등, 열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연극 활동을 이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소란한 해방정국은 그에게 군산민보의 편집국장을 맡기며 전북과 인연을 맺도록 주선해주었다. 그는 군산에 왔다가 전쟁을 만나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수감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때 그는 형의 가족과 친자의 죽음을 맞으며, 군산에서의 슬픈 인연을 뒤로 하고 낙향하였다. 그는 목포에서 목포일보 편집국장으로 일하던 중에, 1956년 전북대학교신문사의 편집국장으로 부임하여 전라북도와 두 번째 가연을 맺게 된다. 그리고 1959년 희곡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가 당선되어 극작가가 된 그는, 재직하던 전북대학교에서 정력적으로 극단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61년 전북대학교 극예술연구회로부터 '창작극회'를 독립시켜 창단하였다.
이로부터 전라북도의 연극판은 박동화가 가르쳤거나, 같이 활동한 인사들로 채워지게 된다. 1964년부터 1978년까지 무려 7대에 걸쳐 연극협회전북지부장으로 재직한 것만 보아도, 그가 이 지역의 연극계에 끼친 영향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외에도 그는 예총 전북지부장을 역임하여 전라북도의 연극뿐 아니라, 예술 문화 발전에 커다란 공을 남겼다. 타 지역 출신이면서도 전주를 사랑한 덕분에, 이 지역의 연극이 다른 곳에 밀리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의 공이다.
박동화의 연극은 살아온 환경을 반영한 탓인지, 대부분 세태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고 있다. 작가의 비판의식이야 워낙 보편적이고 만연되어 남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에 대한 풍자를 통해서 구성원들에게 특정한 메시지를 제시함으로써 완성되어야 문학적이다. 이런 측면에서 박동화의 연극은 사회를 향한 작가의 태도를 살펴볼 수 있고, 또 한편으로 그가 세상을 살아가는 자세를 헤아리기에 알맞다. 그의 대표작 '나의 독백은 끝나지 않았다'는 3막 5장으로 이루어진 장막곡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전쟁 통에 아내를 잃어버린 검사의 이른바 '레드 콤플렉스'와 사랑을 저변에 깔고 있다. 다소 도식적으로 설정된 인간관계는 이곳저곳에 장치한 풍자에 의해 상쇄되면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훌륭히 전달한다. 그것은 권력과 부의 타락, 이데올로기의 남용 현상에 대한 꾸짖음이다.
아울러 박동화는 자신의 삶을 작품에 오롯이 새겨 넣었다. 가령 그의 작품 '상쇠'의 주인공 이상수가 꽹과리에 대해 갖고 있는 지나칠 정도의 집념은 연극을 향한 그의 열정을 가리킬 터이다. 그가 최후작 '등잔불'에서 황태일을 통해 절절하게 남긴 유언은 결국 자신을 향한 매질, 말하자면 노년기에 이르러 젊은 날을 회고하면서 연극 발전에 좀더 노력하지 못한 회한에 다름 아닐 것이다. 물론 그것은 후배 연극인들에게 주는 교훈이기도 할 터이나, 인생을 정리하는 마당에서 선연히 나타나는 이루지 못한 아쉬움을 작품화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이만치 그는 전라북도에 와서 사는 동안에, 그곳에서 맺은 소중한 인연들에게 진 빚을 갚으려고 노력하였다. 그것은 곧 전북의 연극 발전을 위한 기초공사를 튼실하게 다진 일이었고,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한 연극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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