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서 갓 음악을 시작했을 무렵, 만족스럽게 공연을 마치고 무대를 내려올 때면 어김없이 들었던 말이다. “이제 서울로 올라가시나요?” 그 생경한 인사 앞에 나는 늘 거짓말을 했다. “네 곧 올라갑니다. 곧 올라가야죠!” 지역에서 음악 좀 오래 했다는 선배들에게 물어도 답은 한결 같았다. ‘지역에서 음악하는 것, 숨겨야 관객들이 더 좋아해’, ‘지역의 ㅈ만 말해도 관객은 너의 노래를 들으려 하지 않을 거야.’, ‘지역 냄새나게 굳이 밝힐 필요가 있겠니?’
타당한 말이다. 내가 느끼기에도 지역 팀이라고 밝히는 순간 관객들의 긴장은 풀어지고 흥미를 잃은 듯한 태도를 보였으니까. 지역의 인디뮤지션. 그 자체만으로 지역에서 낯선 존재인 우리는 최대한 서울에서 온 인디뮤지션인 척 해야 했다. 그게 공연을 끝까지 집중도 있게 이어가는 데 유리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의 인디뮤지션, 그 중에서도 지역뮤지션에겐 어쩌면 당연하고도 합리적인 전략이었다.
그러나 자못 가슴 한편이 답답한 건 시간이 흘러도 해소되지 않았다. ‘지역과 거리두기’는 합리적인 공연전략임에도 불구하고 대수롭지 않게 풀어헤치려 할수록 더 깊게 조여 왔다. 내 안에는 ‘왜 이렇게 숨겨야만 하지?’, ‘나는 지역이 부끄러운가?’, ‘내 음악이 부족해서인가?’ 등의 괴로운 질문들로 이어졌고, 결국 ‘이곳에서 열심히 노력해 서울로 올라가야지’, ‘이 곳은 나의 진짜 무대가 아니야’라는 생각이 내게 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분명했다. 그때의 나는 지역에서 활동하는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하지 않았고, 지역을 연습무대 정도로만 여겼을 뿐이다. 만족스러운 무대 뒤에 이어지는 ‘그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묘하게 으쓱해했고, 지역에 있어선 안 될 것이 있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들을 즐겼다. 지역에서 활동하는 뮤지션이면서 지역 냄새를 숨기고 지역과 거리를 둘수록 나의 음악적 가치와 자신감이 높아지는 아이러니였다.
하지만 금방 공허해졌다. 나는 어디까지나 서울로 가지 못한 지역뮤지션이고, 지역에 남겨진 패배자일 뿐이었다. 지역뮤지션으로 지닌 낮은 자존감은 지역과 거리두기만으로는 결코 높아지지 않았다. 소위 홍대에서 잘나간다는 인디뮤지션의 무대와 그들이 누리는 인기를 볼 때면 한없이 작아졌다. 그럴 때마다 ‘더 노력해야지, 더 좋은 음악 만들어야지’ 라는 원론적인 다짐을 반복하지만, 이미 나는 처음부터 실패한 채로 아등바등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렇게 지역에서의 삶은 나를 패배자로 만들었다. 이는 슬프게도 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또래의 지역청년들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행복한 지역청년을 만나기 쉽지 않다. ‘인 서울’하기 위해 재수에 삼수를 거듭하는 입시생, 대기업 입사를 목적으로 ‘취업뽀개기’에 몰두하는 취준생, 고시원을 전전하는 공시생, 취업을 유보한 채 망명한 대학원생의 모습으로 지역에 산다. 그렇게 지역을 등지거나 나의 존재를 지역에서 철저하게 숨겨야만 한다.
이렇듯 잘나고 좋은 것들은 모두 서울에 있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회, 반면에 지역에 남겨진 것들은 모두 열등한 것으로 취급하는 의식은 우리 곁에 뿌리 깊다. 그러나 우리에게 진정 열등하고 부족한 것은 나와 내 지역에 대한 자존감, 지역에 사는 우리 스스로를 가치있게 바라보는 자의식이 아닐까?
△김은총 싱어송라이터는 2014년 4월 첫 EP(봄)으로 데뷔해 지역음악 르네상스를 기치로 활동 중이며, 최근 싱글 <전주에 가면>, <키스하지 말걸>, 세번째 EP(겨울) 등을 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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