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찰나의 순간에도 가만히 있지 않고 쉼 없이 달라진다. 인간은 세계가 달라지는 속도와 폭에 적응해야 한다. 세계를 자신이 지배한다고 말들은 할 수 있지만, 변화무쌍한 그 세계에 대한 적응의 효과가 크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고, 효과가 작으면 지배당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 적응의 효과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가 거의 모든 인간적 활동의 핵심 기반이다. 가장 효과 있게 적응하는 장면에 우리는 ‘적중’(的中)이라는 팻말을 건다. 스콜라 철학자들이 말하는 ‘관조’나 동양에서 말하는 ‘중용’이나 다 사실은 이 ‘적중’을 제대로 완수하기 위한 태도이거나 관점일 뿐이다. ‘조용히 관찰하기’(靜觀)나 ‘무심’(無心)이나 ‘무아’(無我) 혹은 ‘무위’(無爲)도 모두 그렇게 하면 훨씬 더 잘 ‘적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모든 이론과 지식도 다 어떤 특별한 변화 상태를 제대로 포착한 지적 체계이다. 역시 ‘적중’의 결과물들이다.
‘적중’은 원래 과녁을 제대로 겨누어 맞춘다는 뜻이다. 한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겨눠야 할 과녁을 정확히 포착한 후 온 신경을 모아 거기에 역량을 제대로 집중시켜야 한다. 근대 초기 일본의 요시다 쇼인은 쇼카숀주쿠라는 조그만 학교를 세워 겨우 2년여 동안 90여 명을 배출한 후, 그들을 앞세워 산업화를 성공시킨다. 같은 시기 조선에는 수백 개의 교육 기관에서 수 많은 젊은이들이 밤을 세워가며 열심히 공부를 했으나 그렇게 조그만 하나의 학교 쇼카숀주쿠 출신들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식민지가 되었다. 우리가 식민지가 된 이유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일본은 그 시대에 해결해야 할 실질적인 문제에 적중하여 부강할 수 있었고, 우리는 그 시점에서 해결해야 할 실질적인 핵심 문제에 적중하지 못하고 그냥 하던 대로 주자학을 외우는 데에만 온 힘을 기울이면서 헛발질을 했기 때문이다. 부강한 길을 가지 못하고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모두 위정척사만 부르짖었다. 지금도 우리는 사실 위정척사의 시절을 살고 있다. 배척과 반동의 시절이다.
‘적중’한 후에는 적중의 효과가 일정 기간 유지되는데, 그 효과에도 생로병사가 있다. 시공간 안에 존재하는 것은 어떤 것도 영원할 수 없다는 큰 원칙이 있지 않은가. 당연히 ‘적중’이라는 성취도 정점을 찍은 후에는 부패와 부식과 권태라는 생명 활동을 피하지 못하고 점점 효력을 잃는다. 여기서 이 사실을 인정하는지 인정하지 않는지부터 스스로 물어보자. 그래야 다음 이야기들을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고 논리적으로나 지적으로 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국(새정부 수립)이나 산업화는 우리나라의 성공 사례 가운데 민주화만큼이나 빛나는 봉우리들이다. 이 두 봉우리 없이 우리 기적의 역사를 말할 수는 없다. 건국이나 산업화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과는 어떤 대화도 시작하기 어렵다. 건국이 빛나는 성취가 된 이유는 그 시대에 중심 문제였던 건국이라는 시대 의식에 적중하였기 때문이다. 적중하였다고 해서 건국이라는 주제를 계속 붙들고 있을 수는 없다. 적중한 후에는 어떤 것도 바로 과거가 되어간다. 건국은 빛나는 성취를 완수한 후에 바로 부식되기 시작하여 다음 시대로 이행해야 한다. 그래서 다음 단계로 이행하여 산업화라는 시대 의식에 적중한 후 우리는 또 빛나는 성취를 이룬다. 산업화에 적중하여 성취를 완수한 후에는 그것이 아무리 빛나는 성취라고 해도 부식을 피하지 못하고 또 다음 단계로 이행해야 한다. 우리는 또 다음 단계로 과격한 이행을 해서 시대 의식에 적중하였다. 민주화라는 큰 봉우리를 또 쌓은 것이다. 지금의 시대 의식은 민주화 다음으로의 이행이다. 민주화 다음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말에 기분이 나쁜지 아닌지를 우선 점검하자. 기분이 조금씩 나빠지기 시작하면, 당신은 지적이지 않다. 법과 논리보다 감정을 중시하는 인식의 초보적 단계를 지나지 못했다. 산업화를 넘어서기 위해서 조금이나마 산업화를 비판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다음을 말하기 위해서 민주화의 부식 내용을 지적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민주화 세력 사이에는 논리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물론 감정적으로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것을 인정해야 다음 대화가 가능하다.
봄은 정점을 찍고 나면 바로 봄 자신을 부정하는 준비에 든다. 이것이 봄의 성숙이고, 성숙한 봄의 격조이다. 여름으로의 이행을 받아들인다. 봄이 봄 자신의 성취와 정당성에 취해 여름으로 넘어가기를 거부하면, 봄 자신이 반동으로 전락할 뿐 아니라 전체 자연의 진화를 망친다. 산업화 세력이 산업화에 취해 산업화의 정당성만 고집하면 산업화 세력 스스로가 반동으로 전락할 뿐 아니라 나라 전체의 진보를 해치게 되는 것과 같다. 여름도 여름으로 완성되고 나면 바로 여름 자신의 정당성을 고집하지 않고 가을에 자신의 자리를 양보한다. 그리하여 여름 자신의 명예를 지킬 뿐 아니라 종내에는 전체 자연의 완성에 기여한다. 가을은 자신의 정점을 찍은 후 바로 자신의 정당성을 겨울에 양보한다. 겨울도 마찬가지다. 사계절이 다 이렇게 성숙한 협력을 하면서 전체 자연을 항상 완성의 단계로 유지할 수 있다. 겨울이 겨울 자신의 정당성에 취해 봄으로 넘어가기를 거부하면, 겨울 자신이 반동으로 전락할 뿐 아니라 전체 자연의 진화를 망친다. 민주화 세력이 민주화 시대의 세계관에 취해 민주화의 정당성만 고집하면 민주화 세력 스스로가 반동으로 전락할 뿐 아니라 종내에는 나라 전체의 진보를 망친다. 지금 우리는 이 단계에 있다. 민주화는 부식하고, 새로운 아젠다는 세우지 못하고...
요즘 나는 문재인 대통령의 정치를 ‘자기 확신에 갇힌 몽환적 통치’라 비판하기도 하고, 민주화 세력들이 깃발을 찢어 완장으로 만들어 차고 다니는 것을 비판하기도 한다. 민주화의 부식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름이 자신의 정당성을 고집하느라 가을로 이행하기를 거부하면서 스스로 반동으로 전락하고, 그 결과로 전체 자연의 진보를 가로막는 것과 똑같이, 산업화 세력이 산업화의 정당성만을 고집하며 산업화 다음으로의 이행을 거부하면서 스스로 반동으로 전락하고 역사 발전의 장애물 취급을 받았듯이, 민주화 세력도 과거의 반동 세력들과 전혀 다르지 않게 스스로 반동으로 전락하면서 나라의 진보와 진화를 가로막는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대에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나 의식에 ‘적중’하지 못하고 자신의 성공 기억에 갇혀서 자신과 국가의 시제를 미래화하지 못하고 과거화하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자신의 성숙과 격조를 스스로 포기하면서 부끄러움과 염치를 상실하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이 우려의 제일 앞에 대통령이 맹목적 지지자들과 함께 콘크리트처럼 굳건하다. 자신이 자신에게 갇힌 형국이다. 모든 논리와 법은 사회적 활동에 필요해서 나온 생산물들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면 아무 필요 없는 것들이다. 자신이 자신에게 갇혀 고립되어 있다면, 논리도 법도 굳이 필요하지 않다. 자신이 자신에게 갇혀서 유기적 사회성을 잃으면 법과 논리는 필요치 않고 오직 감정이나 감각의 정체 없는 심리에 빠져 논리와 법을 무시하거나 거부한다. ‘내로남불’을 일상사로 삼거나 논리의 환각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이러면 국가의 진화나 진보를 가로막게 되고, 결국은 내 삶을 피폐하게 한다. 지도층의 피폐한 삶은 전 사회를 피폐하게 한다. 나는 이것을 걱정하는 것이다.
비판자들을 제압하려는 논리의 환각 상태는 이미 만연해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감정적 악다구니이지 전혀 논리가 아니다. ‘민주화 투쟁기에 당신은 무엇을 했느냐?’라고 묻는 입막음도 있다. 여기에는 그 시기만 우리가 살아야 할 시대라는 자폐적 우월감이 도사리고 있다. 여름에게 절대 양보하지 않으려는 완고한 봄의 기세를 닮았다. 그리고 민주화 시기에 대오를 이루어 힘을 보태던 이름 남기지 못한 대중들을 민주화의 소비재로 격하하고 도외시하는 자폐적 선민의식도 있다. 요즘 현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글을 쓰고 나면 댓글들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 때는 아무 소리도 안 하다가 왜 문대통령만 갖고 그러느냐는 내용도 있다. 감정을 벗고 논리에 집중하면 사람은 치우치지 않는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사적이지 않고 공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 감정은 사적이고, 논리는 공적이다. 그러면, 모두가 ‘최순실 게이트’라고 말할 때 비교적 빨리 사태를 ‘박근혜 게이트’로 정리하고 “본질은 ‘박근혜 국정농단’이다”는 글을 발표할 수 있다. 이렇게 자기가 한 일을 예로 들어가며 글을 써야 하고 자신을 변명해야 하는 공포가 엄습하는 지금은 ‘문장의 수난 시대’나 ‘논리의 시궁창’ 같은 시대이다. 극복의 대상이었던 ‘그때 그 시절’이 다시 돌아왔다. 어느 코미디언이 전두환 대통령에 대해서 한 “왜 나만 갖고 그러느냐?”는 표현은 논리와 법을 무시하고 감정에 휩싸이다가 불편해지면 누구나 쉽게 사용하는 말이다. 시험 중 부정행위를 하다가 발각된 학생이 “왜 나만 갖고 그러느냐?”고 반응했다면, 이는 논리보다는 감정에 호소하여 논점을 흐려버리는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단순히 알 권리보다 조금 있다가 알아도 될 권리가 있을 것 같다.”는 말로 현 상황을 지배하려 한다. 정말 민주화를 건너온 우리나라의 법무부 장관이 한 말로 상상이 되는가. 이 말이 누가 했는지 모를 때는 화가 났는데, 추미애 장관이 했다는 말을 들으니 이해가 되고 수긍이 된다면, 당신은 아직 논리나 법보다는 감정의 단계에서 살고 있다. ‘조금 있다가 알아도 될 것’은 우리가 정할 테니 너희들은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독재적 태도이다. “대통령 측근 수사 때 검찰개혁 추진하는 건 수사 방해로 비친다.” 이 말은 맞는 말인가 틀린 말인가. 누가 한 말인지 모를 때는 맞는 말처럼 들리는데, 문재인 대통령이 한 말인 것을 알고 나니 듣기 싫어지거나 틀린 말로 들리면 당신은 아직 논리보다는 감정에 빠져 있다. 임미리 교수를 고발하는 일이 정말 가능한 일로 보이는가? 이 일로 화가 나면 당신은 논리적이며 공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상황 논리로 이해하려고 애쓰고, 얼른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고 싶어지면 당신은 아직 감정을 극복한 정도는 아니다.
논리의 환각 상태에 빠지거나 감정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왜 문제인가. 그것들에 좌우되는 한 우리는 이 시대에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에 적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화 다음의 단계는 선도력을 갖는 단계이다. 과학의 단계이며 인문의 단계이며 논리의 단계이며 법의 단계이다. 종속성을 벗어난 단계이다. 더 독립적이고 더 자유스러운 단계이다. 이 시대의 급소에 적중할 수 있는 능력이 감정인지 아니면 논리나 법인지 잘 살필 일이다. 민주화 다음으로 상승하는 진정한 혁명을 꿈꿔야 한다. 감정을 벗어나 논리력만 회복하면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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