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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의 새 말, 새 몸짓] 본 것과 믿는 것 사이에서

송필용 작품 '무제'
송필용 작품 '무제'

1990년 8월 23일 어느 시간, 만 31살이 조금 넘은 나는 홍콩행 비행기를 탔다. 처음 타보는 비행기가 국제선이어서 좀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국제선은 국내선을 충분히 타 본 후에 타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었다. 내게 홍콩행 비행기는 홍콩을 가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목적은 위도 상 훨씬 더 높은 곳에 있는 하얼빈이었다. 하얼빈에서도 흑룡강 대학이 최종 목적지였다. 당시 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국교가 수립되지 않아서 거의 모든 방면에서 교류가 되지 않을 때라 비행기도 바로 가는 것이 없었다.

사회주의 국가 중국의 하얼빈 공항에 내리니 저녁 7시가 조금 넘었었다. 어둠이 많이 내려앉았고, 대륙 북방의 서늘한 기운이 벌써 깊은 가을처럼 느껴졌다. 공항은 한국의 지방 소도시 버스 터미널 같았다. 지방 소도시 버스터미널처럼 보이는 공항을 보고 중국이 경제적으로 매우 낙후한 나라일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공항을 떠나 흑룡강 대학까지 오는 풍경은 아직도 내게 깊이 새겨져 있다. 이것이 중국의 첫 인상이다. 사람들은 어깨에 별 이득도 없는 무거운 짐 하나를 진 채 그저 걷기만 해야 하는 숙명을 지닌 사람들처럼 맥이 없었다. 지금도 기억한다. 공항이 남루한 것은 공항 자체의 탓도 있지만, 공항을 채운 사람들의 표정과 걸음걸이가 그렇게 보이도록 한 탓이 더 큰 것 같았다. 삶의 생기가 돋아나지 못할 어떤 덫에 갇힌 것 같았다. 정비되지 않은 길 양 옆으로는 군인인지 민간 경비원인지가 애매한 사람들이 긴 총을 메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성거렸다. 감시할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자세다. 공항을 훨씬 떠나 시내에 가까워 오면서도 공항에서 발견했던 무기력과 가난과 감시와 통제라는 음산한 기운은 내 인식의 언저리를 떠나지 않았다. 첫인상은 상당히 오래갔다. 강렬해서 오래 가기도 했지만, 하얼빈에서 사는 내내 그런 것들이 매일매일 경험되었기 때문이다.

하얼빈이라는 낯선 곳으로 오기 전에 학교생활만 줄곧 했던 나는 ‘비판적인 지식인’의 형상으로 채워진 분위기 안에 잠겨 있었다. 그 분위기는 내가 거기에 얼마나 친화적이었었는지 상관없이 마치 컴퓨터의 바탕화면처럼 보편적이었다. 내가 대학 1학년 때 대통령이 자신의 심복에게 피격되어 사망했다. 군대 가기 전 2년간의 대학 생활동안 기말고사를 봐 본 적이 없다. 기말고사 기간까지 수업이 진행되기 어려울 정도로 학생들은 반독재 투쟁에 여념이 없었고, 심지어 경찰들이 교정에까지 들어와 머물렀다. 매 학기 중간도 못 가 휴교를 반복했다. 박정희를 거칠게 욕하는 일이 지식인에게는 매우 당연시 되었다. 대부분의 젊은 학생들은 학습이 깊어지면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파고들었다. ‘운동권’도 아닌데다가, 경찰에게 잡히거나 경찰서에 불려가 본 적도 없이 그저 데모 행렬 꽁무니나 따라다니던, 당시 풍조에서 볼 때는 외양만 겨우 지식인 꼴을 한 나 같은 사람도 박정희 비난과 자본주의 비판에는 인색하지 않았다. 얼마나 깊은 정도로 발을 담근 운동권이냐는 상관없이 대학생이라면 반정부와 반자본주의 구호는 그렇게 강하게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주류의 흐름이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김일성과 사회주의에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거나 거기서 무슨 탈출구를 찾으려고 하는 일군의 시도가 강하게 있었다. 당시에는 나에게도 사회주의나 김일성은 우리의 모순을 들여다보는 또 다른 창이거나 대안으로 보이곤 했다.

하얼빈에는 북한 유학생들이 있었다. 나는 북한 유학생들과 면식을 트고 지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가능해지니, 호기심이 더 생겼다. 괜히 그동안 보여주지 못했던 동포애를 어떻게든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싸이기도 했던 것 같다.

중국은 나에게 한국 자본주의 모순을 해결할 대안으로 제시되곤 했던 사회주의를 직접 보는 계기가 되었고, 북한 사람들은 김일성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세력들이 대학가를 지배하던 때라 김일성의 후예들을 직접 상대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나는 여기서 놀라운 경험을 한다. 어느 날 나하고 친하게 지내던 북한 학생 한 명이 어떤 낯선 사람과 함께 얘기하면서 다가왔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네려고 하는데, 그 북한 학생은 나를 애써 외면하였다. 그의 표정에서 나는 모른 체 해야만 하는 어떤 곤혹스러움을 읽었다. 돌아와서 이 이야기를 하자, 나보다 먼저 북한 학생들을 만나 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런 경우를 당해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북한 학생들은 아무리 친해도 제3자인 다른 낯선 북한 사람과 동행할 때에는 남한 사람들을 모른 체 했다. 서로를 경계하고 의심하는 태도를 취해야 살아갈 수 있는 나라라면 어떻게 설명하더라도 지상낙원일 수 없다.

나는 하얼빈에 온지 약 100일 만에 심하게 앓은 적이 있다. 이유도 없이 아팠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잘 모른다. 혹시 사회주의와 북한을 자본주의와 대한민국의 비판적인 대안으로 간주하던 인식을 부정하는 일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었나 하고 짐작할 뿐이다. 자기 인식의 틀이나 믿음을 자각하여 부정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이 불가능한 일을 하느라 심하게 앓지 않았을까? 내가 직접 두 눈으로 본 사회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가난이었다. 등소평도 “가난이 사회주의는 아니다.”고 말할 정도로 가난과 사회주의는 이미 매우 가까워져 있었다. 북한 학생들의 생활 모습이나 외모나 태도 등을 통해서 북한은 또 얼마나 가난한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하얼빈에 체류할 때는 등소평이 1978년 12월 18일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회의에서 개혁개방을 천명한지 벌써 12년이나 흐른 뒤이다. 개혁이란 내내적으로 적용되는 관념으로서 자유 시장과 자본주의를 받아들인다는 뜻이고, 개방이란 대외적 관념으로서 중국이 국제 시장에 문호를 개방한다는 뜻인데, 자본주의적 요소를 받아 들인지 12년이나 흐른 후인데도 가난은 너무 분명했다. 내가 사회주의와 북한 사람들을 직접 경험하고 나서 얻은 결론은 다음의 몇 가지 단어들로 남았다: ‘가난’, ‘감시’, ‘통제’, ‘불안’, ‘공포’, ‘독재’, ‘억압’. ‘타율’. 막연한 상상이나 이론으로만 접할 때하고, 직접 눈으로 보며 경험하며 접할 때가 너무 많이 달랐다. 여기서 나는 엄청난 당황스러움에 빠져 괴로워했다. 앓고 나서는 몇 가지 이데올로기적인 믿음을 수정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자본주의가 아무리 모순을 내포하고 있더라도 사회주의보다는 낫다. 박정희 대통령이 아무리 심하게 독재를 했어도 김일성의 독재보다는 낫다. 대한민국의 언론 자유가 아무리 비판을 받더라도 중국이나 북한의 그것보다는 훨씬 낫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치욕의 역사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역사다.”

나는 지성을 성장 시키는 분위기가 아니라 지성을 마비시키는 분위기에 압도되었었다. 건강하게 성장하는 지성이었다면, 자본주의 비판하다 사회주의로 바로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 비판하다가 바로 김일성에게로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 비판하다가 중국이나 소련으로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하얼빈에서 크게 앓으면서 현실 속에서 내 눈으로 직접 경험한 것을 가지고 나를 교정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 비판은 사회주의로의 전향이 아니라 자본주의 수정으로 귀결되어야 하고, 박정희 비판은 김일성 추종이 아니라 박정희 수정으로 진화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그렇지 않았다면, 동구권 사회주의 몰락을 보고, 소련이 해체되는 것을 보고,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성큼 성큼 발전하는 것을 보고, 사회주의 정책을 고집하다가 몰락한 베네수엘라를 보고도 다른 사람들이 한 말들로 채워진 믿음을 계속 믿으려 고집을 피우다가,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을 외면하는 우를 범했을 것이다.

한동안 북한에 대한 인식 방법으로 ‘내재적 접근법’이라는 이론이 상당한 환영을 받으며 유행한 적이 있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내재적 접근법’은 북한을 그들이 설명하는 가치와 이념에 따라 있는 그대로 이해하자는 것”이다. 북한을 북한의 시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론의 대접을 받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론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최소한의 미덕은 객관성과 보편성이다. 주관적인 감각을 벗어나야 하며, 어떤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매우 넓은 범위 어디에나 치우침이 없이 적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북한을 대할 때만 ‘내재적 접근법’을 사용하였다. 우리 자신, 즉 대한민국을 대할 때는 ‘내재적 접근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우리 스스로에게는 인류 보편의 가치 기준을 적용하였다. 북한을 이해할 때는 북한의 특수한 상황을 기반으로 해서 하고, 우리를 이해하려 할 때에는 ‘인권’, ‘민주’ 등의 보편적인 잣대를 가지고 했던 것이다. 편파적이나 임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이론이 아니다. 이론이 아닌 것을 이론처럼 사용하던 그런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고, 그것을 변경하지 못하는 지금의 시간들도 있다. 이론을 이론으로 다루는 훈련을 전문적으로 받았다는 지식인들도 이 ‘내재적 접근법’을 편파적으로 사용하고, 정작 자신의 ‘내재적 상황’에는 한없이 자학적이었으면서도 매우 냉철한 지적 시선을 유지하는 것으로 포장하던 시절이었다.

내 책 『인간이 그리는 무늬』에 나오는 한 대목을 옮겨 본다. “우리가 진리하고 하면, 구체적인 세계를 넘어서서 어떤 무엇인가로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요. 진리는 어쩐지 변화무쌍한 구체성과는 다른 어떤 것 같습니다. 초월적이고 관념적인 어떤 형상을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런 것은 조작된 것입니다. 가공물이고 인공물이지요. 이 세계에 존재하는 건 구체적인 실재의 세계뿐이지요.” 진리의 세계는 실재의 세계에 있다. 그래서 등소평도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實踐是檢驗眞理的唯一標準)이라는 말을 한 것이다. 진리는 실재의 세계에서 태어나고, 실재의 세계에서 구현될 뿐이다. 남이 정해준 어떤 ‘주의’(主義)에 대한 믿음 대신에 내 눈으로 직접 경험한 것을 더 신뢰할 수 있으려면 상당한 정도의 용기와 지적 계몽이 필요하기도 하다.

뮤지컬 ‘시카고’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키티가 자신의 남편이 다른 두 여자를 끼고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는 분개하여 총을 겨누자, 남편이 말한다. “당신이 본 것을 믿을래? 아니면 내 말을 믿을래?” 말이 끝나자 키티는 자신이 본 것을 믿고 남편에게 총을 발사한다. 남편이 설득하려고 하는 말은 결국 남이 하는 말이다. 우리에게 있었던 거의 모든 ‘주의’(主義)는 남들이 정한 것들이다. ‘남의 말’인 것이다. 자신이 직접 본 것을 믿고 파고드는 자는 총을 발사하는 위치에 서고, 다른 사람의 말을 믿자고 하는 자는 총을 맞는 위치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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