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다’의 문제를 접하다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는 것을 보고 관점의 차이겠거니 하면서 스스로를 달래보기도 했다. 그러나 관점의 차이가 아니었다. 결국은 무지하기 때문이다. 무지가 어떻게 ‘타다’의 문제까지 연결되는가. 우리가 보통 안다고 말할 때의 ‘앎’은 ‘어떤 것에 대하여 지식을 갖는 것’이라고 하나, 그것으로는 ‘앎’을 다 설명하지 못한다. ‘앎’은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발버둥 치는 일’이다. ‘앎’은 지식이 아니라 오히려 ‘발버둥’이다. 이 발버둥은 어디를 향하는가. 아직 이해되지 않은 곳,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을 향한다. 이 발버둥을 통해서 앎은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한다. 즉 미래를 여는 것이다. 미래를 향하는 사람들은 항상 아는 것에 멈추지 않고, 아는 것을 근거로 해서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발버둥 친 사람들이다. 아는 자는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발버둥 치고, 모르는 자는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주물러 자기 성을 쌓는다. 아는 자는 미래를 열지만, 무지한 자는 멈춰 서서 과거의 것들을 지킨다. 제대로 훈련된 지식인이라면, 미래를 여는 정방향에 서서 발버둥을 친다. 훈련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으면 자기가 쌓은 성 밖으로 감히 나서지 못한다. 성을 나서지 않고 성 밖의 변화에 반응하려는 삶은 힘이 든다. 그런 사람들은 이 힘든 과정을 억지로 견디면서, 그것을 열심히 사는 것으로 포장하거나 심지어는 자신을 헌신하는 자로 각색한다. 어쨌든 정책을 결정하는 위치에 ‘아는 사람’이 있는 나라는 효율적이었고, 거기서 무지가 판을 치면 비효율적이었다. 이치는 복잡하지 않고 간단하다. 효율적인 일이 계속 이어지면 흥하고, 비효율이 계속 이어지면 망한다.
아는 자, 즉 발버둥을 칠 줄 아는 사람들은 어떤 물건을 ‘현상적인 차원에서 감각되는 것’, 그것으로만 보지 않는다. 발버둥을 쳐서 감각을 넘어서는 차원으로까지 인식을 확대할 줄 안다. 시간을 돌려 조선 시대로 가보자. 어디선가 조총이 새로 발명되어 조선에까지 들어왔다. 물론 조총도 앎의 발버둥을 칠 줄 아는 누군가가 만들었다. 앎의 발버둥은 발명할 때 한 번만 행사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후로도 사용의 과정에서 계속될 기회가 생긴다. 앎의 발버둥을 치는 사람에게 조총은 보이고 만져지는 현상적 차원의 것이 다가 아니다. 보이고 만져지는 차원을 넘어서서 ‘구조’적인 차원까지 이해의 전선을 확장한다. 현상적 이해를 넘어 구조적 이해에 도달한다.
조총 이전의 것이면서 조총에 비견되는 것은 활이다. 조총은 활보다 사거리가 멀고 파괴력이 크다는 사실에만 머물지 않는다. 기능적으로는 그렇게 보이지만, 조총을 주력으로 구성할 전투의 양식이나 대오의 형성이나 훈련의 방식 등은 활이 구성하는 그것들과는 전혀 달라진다. 총체적으로 전쟁의 구조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럼 그 구조는 어떻게 해서 달라지는가. 바로 재료가 달라지고, 제조법이 달라지고, 작동 메커니즘이 달라지면서 다른 구조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조총은 활과 다른 구조로 확장되면서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든다. 이것이 ‘구조’적인 차원에서 이해한다는 뜻이다. 보이고 만져지는 현상적 차원에 대해서 ‘앎의 발버둥’이 쳐져야만 아직 알려지지 않은 구조의 차원으로 넘어갈 수 있다. 무지하면, 이런 인식 차원의 이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보이고 만져지는 단계의 현상적 인식에 갇혀 있으면 조총과 활의 차이는 크지 않다. 활에 화살을 걸어 쏠 준비를 하는 것에 익숙해 있는 사람에게는 조총에 화약을 쑤셔 넣어 쏠 준비를 하는 것이 오히려 번거롭게 보일 뿐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조총이 무슨 대단한 신무기냐? 별것도 아니면서 수선스럽기만 하다. 차라리 활이 더 편하다.” 조선 시대에도 조총이 들어온 초기에 이런 흐름이 있었다. 이것이 현상적 인식에 머무르는 무지한 방식이다. 구조에 대한 인식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현상적인 단계의 기능에 파묻힌 인식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기능’만 보일 뿐이다. 기능만 보면 기능적인 차이로만 그 혁신의 가치를 매기고, 혁신을 별 것 아닌 것으로 과소평가한다. 과소평가하면, 적응이 늦고, 적응이 늦으면 뒤처진다. 하지만, 구조적으로 보면 활과 조총은 전혀 다른 물건이다. 무엇인가를 발사하여 사람을 죽이는 기능은 같지만, 각각이 펼치는 구조적인 변화와 맥락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기능적인 차이를 넘어서서 구조와 맥락의 차이를 아는 정도가 되면, 조총에 적응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장전하기에 들어가는 시간을 전술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고안할 것이다. 즉 열을 지어 서서 앞줄에서 발사를 마치면, 그 시간에 화약을 채우던 뒷 줄에서 이어서 사격을 하는 방식으로 전혀 다른 전투 대오를 개발하는 것이다. 전장의 또 다른 세계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조총과 활을 너무 긴 시간 같은 차원에 놓고 비교하며 물고 늘어지다가는 전장의 새로운 세계를 열 수 없다. 조총과 활이 기능적으로는 유사하지만, 구조적으로 전혀 다른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다. 미래를 여는 자와 과거에 닫힌 자 사이의 차이다. ‘타다’와 택시는 기능적으로 보면 유사하게 보일 수도 있다. 구조적으로 보면 전혀 다른 두 가지이다. 작동 시스템이 다르고 운영 체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조총과 활의 차이와 유사하다. ‘타다’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들이다. “택시보다 별로 혁신적이지도 않다.” 조총이 새로 등장했을 때, 활에 익숙한 사람들이 조총에 대해서 하는 말과 똑같다. ‘타다’는 택시가 아니다. 자동차는 마차가 아니고, 택시는 인력거가 아닌 것과 같다.
심각한 일은 ‘타다’를 허용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가 단순히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고, 우리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새로 등장한 것을 환영하기보다는 이미 있는 것들을 지키는 일에 더 익숙하도록 훈련되어 있고, 미래를 여는 일보다는 과거를 지키는 일에 더 익숙하도록 훈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끔찍한 올가미나 덫에 갇힌 형국이다. 우리는 새로운 것들을 환영하거나 미래를 여는 시도를 하는 것보다 이미 있는 것을 보호하고 과거를 따지는 일에 몰두해야 진실한 삶을 사는 것 같은 생각이 들도록 훈련되어 있다. 이는 질문보다는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것과 연관이 있다. 대답은 이미 있는 이론과 지식을 그대로 담아 두었다가 누가 요구할 때 그대로 뱉어내는 일이다. 이때 승부는 누가 더 빨리 뱉어내는가, 누가 더 많이 뱉어내는가, 누가 더 원래 모습 그대로 뱉어내는가에 좌우된다. 대답에 빠지면, ‘원래 모습’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원래 모습은 시제로 과거에 해당한다. 그래서 대답에 익숙하도록 훈련된 인재들이 채우는 사회는 모든 문제가 과거 논쟁으로 빠지고, 과거를 파헤치는 일에 빠져 있어야 진실한 삶을 사는 느낌이 들게 되어있다. 질문은 궁금증과 호기심이 튀어나오는 일인데, 이 궁금증과 호기심은 본질적으로 아직 해석되지 않은 세계 즉 미래를 향한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질문하는 힘은 매우 약하고 대답하는 능력은 매우 강하다. 이 말의 의미는 간단하다. 우리에게는 과거에 갇히기 쉬운 경향이 있고, 미래를 열기에는 매우 어려운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 갇힌다는 뜻이 제도적으로는 규제에 갇히는 것으로 나타날 뿐이다.
새로 등장하는 것에 적극적이었던 때가 있었다. 산업화 시기였다. 산업화를 지내고 나서 민주화를 거치며 지금까지는 다시 과거에 갇혀버렸다. 과거에 갇힌 관료들은 규제를 앞세운다. 모든 새로움은 규제에 갇혀 싹을 틔우지 못하고 고사한다. 드론이 그랬다. 규제를 앞세운 한국의 드론 산업은 처음에는 기술력이 중국보다 앞섰지만, 이제는 존재감이 없어졌고, 규제를 적용하기 전에 먼저 허용을 선택한 중국의 드론 산업은 후발주자로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제패하였다. 여기서 발생했어야 할 이익을 놓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전적으로 국가의 책임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배운 바가 없다. 대통령이 나서서 아무리 ‘인공지능 국가전략’을 발표해도 인공지능의 토대인 데이터를 모으는 일이 규제에 갇혀 순조롭지 않다면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크다. 데이터를 모으지 못하면 4차 산업혁명은 없다. 당연한 일 아닌가. 생명공학은 어떤가. 수많은 규제에 갇혀 새로운 시도는 아예 엄두를 못 낸다. 새로운 기술력으로 가능해진 원격의료도 불가능하다. 이 혁명의 시기에 혁명의 흐름에 맞춰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4차 산업 혁명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가 ‘공유 경제’이다. ‘타다’의 문제는 단순히 ‘타다’에 한정되지 않는다. 새로운 형태의 공유 경제를 경험하느냐 못하느냐와 직결된다. 이런 경험의 정도가 점점 쌓이면서 4차 산업 혁명의 적응 능력을 기르는 데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 ‘타다’의 금지는 이 적응 능력의 축적을 금지하는 것과 같다. 2년 전에 워싱턴에 갈 일이 있었다. 가기 전부터 나는 ‘우버’를 타볼 계획을 세웠다. ‘우버’을 타면서 전혀 새로운 삶의 방식 속으로 진입한 느낌을 받았다. 그 편리함도 매우 만족스러웠지만, 소비자의 선택이 매우 강한 주도권을 행사하며 작동되는 매우 특별한 느낌도 받았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타다’ 논쟁에서 가장 우스운 일은 소비자(이용자)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왜 소비자에게는 묻지 않는가. 고정된 제도의 틀만 다루다 보니,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소비자를 고려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의 진실은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소비자에게서 확인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경험과 이용의 주체는 소비자이다. 나중에는 결국 소비자가 결정한다.
문명의 흐름에 맞는 새 일을 시도하는 일 자체도 어려운데, 과거에 갇힌 규제로 그런 시도를 하는 사람들을 더 어렵게 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의 국가는 철저하게 과거에 갇혔다. 격려는 못 할망정 방해는 말아야 한다. 다른 나라들과 경쟁해야 할 사람들을 규제와 싸우게 하여 진을 빼는 일은 말아야 한다. 새로운 일을 꿈꾸는 사람이 허가권을 가진 관청을 떠올리기만 해도 우선 가슴이 답답해진다면, 이는 발전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최대의 격려는 허용하는 일이다. 국가의 발전은 규제에 있지 않고 허용에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미래는 규제할 수 없다』는 구태언의 책 제목이 절규처럼 들려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국가를 관리하는 관료들이나 정치인들은 한 번 읽어봤으면 하는 시 한 토막을 적는다. “얼마 전에 새로 번지가 생긴 땅에/한 채의 집을 지은 나는/세 식구의 가장으로서/나의 하늘과/별과/구름과/시에게 이르노니/너희 마음대로/떴다 지고/흐르다 멈추고/왔다 가거라!(이창기 ‘즐거운 소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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