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상대방의 말에 제대로 반응하고 있는가?
5년 전 초겨울, 서울에 살 때 있었던 일이다. 3호선 양재역에서 교대역으로 걸어가야 하는 상황에 핸드폰 배터리가 다 돼서 전원이 꺼졌다. 양재역에서 교대역까지 지하철을 타면 한 정거장만 가면 되는 가까운 거리일 수 있지만, 걸어가면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걸어가기에 멀고 날씨도 쌀쌀해 평소 같으면 걷지 않았겠지만 머릿속이 복잡해서 찬 바람에 정신을 차릴 겸 걸어가기로 했다. 빠른 걸음이면 30분 정도에 갈 수 있으니 서둘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마침 핸드폰 배터리가 다 돼서 꺼진 상황이라 방향치에 길치인 나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교대역으로 갈 수 있는지 몰랐다.
주변에 버스를 기다리는 직장인에게 물었다. ‘교대역으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해요?’라고 물으니 직장인은 ‘거기 멀어서 못 걸어가요. 지하철 타면 한 정거장이에요’라고 답했다. 음? 약간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는가? 어느 쪽으로 가야 하냐고 물었는데 걸어가기 어렵다는 말이 돌아왔다. 제3자로 이 상황을 보니 질문에 적합한 대답이 아니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겠지만, 사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채 이런 식의 대화를 자주 반복한다.
예를 들어 ‘다 끝나려면 얼마나 남았어?’라는 질문에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어’라고 답하는 경우가 있다. 말하는 이가 묻는 말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먼저 하는 것이다. 이처럼 말한다고 대화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양재역에서 질문을 받은 직장인의 ‘걸어가기에는 멀어요.’라는 대답은 사실 나를 걱정해주는 말이었다. 가는 길이 멀다는 것을 알려주고 친절하게 지하철 타면 한 정거장이니 도보보다 가깝다는 것까지 알려준 것이다. 나를 걱정해주고 대안까지 마련해주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나의 궁금증은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멀지만 걸어가기로 했어요. 방향치라서 교대역으로 가는 방향을 모르겠어요. 어느 쪽으로 가야 할까요?’ 그제야 ‘아, 저쪽으로 가면 돼요’라고 손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알려주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며 그분을 지나쳐 교대역으로 향했다. 양재역의 직장인이 내 질문을 제대로 듣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자기 생각을 우선시했다.
그렇다면 잘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잘 듣고 싶다면 상대방이 말할 때 자기 생각에 빠지거나 대답할 말에 대해 고민하기보다는 우선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귀와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위의 예시를 좀 더 들여다보자. A의 ‘다 끝나려면 얼마나 남았어?’라는 질문에 B의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어’라는 대답은 A가 원한 답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A는 다시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원하는 답을 듣기 위해 ‘아니, 끝나려면 얼마나 남았느냐고?’라고 한다면 A도 B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이다. B는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언제 끝나냐고 물어보니 재촉하는 느낌이 들어 방어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렇다면 A가 ‘시작한 지 얼마 안 됐구나. 재촉하는 건 아니고 전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 건지 궁금해서 물어봤어. 알 수 있을까?’라고 다시 물어본다면 둘의 대화는 한결 편안해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말하는 이가 한 말에 대한 반응이나 대답을 먼저 한 후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신이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첫 번째 반응이다. /정은실 사회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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