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의 <꽃> 중에서 꽃>
전주에 내려온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2020년을 돌아보며 방 안의 수없이 많은 메모지를 정리하다가 친구가 적어준 시를 다시 읽어본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라는 구절에 마음이 훅 빨려 들어간다. 필름처럼 전주에서 보내온 시간이 스쳐 지나가다가 갑작스레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누군가의 무엇이 되고 싶어 발버둥 쳤던 1년이었구나. 내가 이렇게 괜찮은 사람이고 일 잘하는 사람이자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부단히 애썼던 한 해였구나. 애썼던 자신을 되새길수록 입이 마르고 쓴맛이 난다.
타자를 의미 있는 누군가로 이름 짓는 것은 내 미래를 불명확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하나의 몸짓에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내 삶에 구체성을 가지고 들어오며 그로 인해 나의 미래가 불명확해진다. 그랬다. 끊임없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의미 담은 이름을 붙여주고 마음이라는 땅에 잘 심어주었다. 잘 자라난 이름은 의미라는 잎이 되서 만족감이라는 열매를 주고 잘 자라지 않은 이름은 의미만 남아 땅의 양분을 빼앗아 갔다. 어느새 마음의 땅은 메말라 죽은 땅이 되어가고 있었다. 구체성을 가진 의미 있지만, 의미 없는 이름들이 늘어갈수록 내 미래는 더 불명확해져갔지만 알아채지 못했다.
내가 붙여준 그 이름의 완성을 위해 그의 말을 경청하고, 그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노력하는 데에는 익숙하면서 이름이 자라는 땅에는 마음을 쏟지 못하고 얼마나 병들고 있는지 보지 못했다. 결국, 잎은 자라지 않고 열매는 맺지 못하며 말라비틀어진 줄기들만 남아 있다. 갈라진 땅에서 그나마 남아 있는 양분을 갉아먹으며 다른 갈망이 자라났다. 내 말을 들어줘요. 나를 이해해 줘요. 나를 존중해 주세요. 이제 와 돌아보니 마르면 마를수록 이해받으려는 갈망은 커지고 애초에 채워질 수 없는 갈망은 메마른 땅을 뒤덮어 속이 말랐는지 어떤지 알아채지 못했다. 갑자기 멈춰보니 무엇을 위해 이렇게 일하고 있는지,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타인에게 무엇이 되기 위해 보여주려고 만든 틀 안에 오랫동안 갇혀서 사람들이 인식하는 내가 나인지, 혼란스러워하는 내가 나인지, 또 다른 내가 있는지 헷갈리며, 헤매는 어딘가쯤에 지금 서 있다.
산다는 것은 결국 끝없는 불안 속을 헤쳐나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닌 타인에게 몰입하면 그의 판단과 시선에 갇히게 된다. 벗어나려 애쓸수록 더 강하게 인식된다. 타인의 판단과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내 인생에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집중하기보다는 이곳을 걷고 있는 나의 존재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머리를 곧게 세우고 어깨를 펴고 걸으며 나의 존재를 실감해야 한다. 인간의 삶이란 그저 먹고, 자고, 싸고, 그런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처럼 특별한 것으로 채우고, 특별해지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마음에 휴식을 위해 친절을 내려놓고, 불안한 이 감정이 괜찮은 것임을 인정하고, 기꺼이 이상한 사람으로 살아갈 용기가 필요한 때이다.
세상의 모든 이상한 사람을 예찬하며 이상한 글을 마친다. /정은실 사회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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