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램지어 하바드대 로스쿨 교수의 논문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 핫이슈가 되고 있다. 선택적 사료 활용과 존재하지도 않는 자료를 근거로 일제강점기에 강제 동원된 일본군 위안부를 ‘자발적 매춘부’로 몰아가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학문과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 하에 반인권적인 역사인식을 고스란히 쏟아낼 수 있었던 배경에 전 세계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는 일본 정부와 기업이 있다고 해도 무리한 추리는 아닐 것 같다. 일본의 행태를 더 이상 지켜볼 수만 없으셨는지 일제 강점기 위안부 피해자 중 한 분인 이용수 할머니가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서 판결을 받아보자고 강하게 주장하셨다고 한다. 만일 국제사법재판소 제소한다면 무슨 법을 적용하게 될 것인가와 어떤 전략을 취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어제 모 대학원 강의에서 발표할 기회가 있었는데, 끓어오르는 분노에 비해 할 수 있는 대응방안이 제한적이어서 더 속이 상했다.
일본만 문제가 아니다. 요즘 일부 중국 네티즌들의 행태가 참으로 점입가경을 지나 목불인견의 지경에까지 와 있다. 김치가 자기네 것이라고 한동안 주장하더니, 작년에는 자기네 전통 의상인 치파오로는 안되겠는지 우리 한복이 중국옷을 베낀 것이라고 난리였다. 그런데 급기야 올해 들어서는 민족시인 윤동주마저 중국 사람이라고 우기고 나선 것이다. 지난 달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일과의 시작을 중국 네티즌이 보낸 메일, DM, 댓글들을 지우는 것으로 한다며 캡처 사진 한 장을 공개했다. ‘백주 대낮 윤동주 강탈 사건’이라고 제목을 붙일 만한 일이었다. 이 소식에 대다수 국민들은 실소를 넘어 강한 분노를 느끼고 있다. 우리는 이웃나라 복이 지질이도 없다는 생각이 든 건 필자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일제와 맞서 저항하기 위해 만주 북간도로 건너간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이 죄다 중국인이라고 막무가내로 주장하는 네티즌들이 그들 선조와 마주한다면 과연 무슨 얘기를 들을까?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과 더불어 그곳 명동촌에서 힘들게 견뎌냈던 중국인 조상들이라면 어리석은 그들 네티즌들에게 냅다 혼구녕부터 낼 일이다. 윤동주 시인과 중학 동기였고 연세대 동문이기도 했던 김형석 교수께서 여전히 정정하시다는 것이 그래서 더 고맙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살아 있는 역사이고 증인이시니 말이다.
이웃 복과 김형석 교수님을 얘기하다 보니 지난 칼럼에 언급했던 팔복이 떠오른다. 그런데 정말 우연인지는 몰라도 윤동주 시인이 쓴 ‘팔복’이라는 시가 있다. 중학교 시절부터 하루에 몇 편씩 시를 써서 다작이던 그분이 1939년 9월 이후 14개월이나 절필한 끝에 1940년 12월에 쓴 시가 바로 팔복이다. 그 내용은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를 여덟 번 단순 반복한 끝에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로 맺는다. 그의 육필 원고를 보니 마지막 문장은 ‘저희가 슬플 것이요’라고 썼다가 지우고, 다시 성경구절처럼 ‘저희가 위로함을 받을 것이요’로 바꿔 썼다가 또 다시 두 줄로 그어 새로 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왜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를 여덟 번이나 반복했을까?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또 그리 썼을까? 시를 한참을 읊다보니 문득 자신만의 답이 떠오른다. 그래, 우리의 처지를, 그때와 작금의 안타까운 상황을 슬퍼하는 거로부터 시작하자. 여덟 번, 아니 여덟 번의 여덟 번이라도. 그러나 그러고만 있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냥 영원히 슬플 일만 남을 것이다. 그러니 이를 악물고 이겨낼 힘을 길러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팔복이 올 것이요, 영원히 행복하게 될 것이다. /이강만 한화에스테이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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