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불쑥 남의 집에 가면 실례이지만, 어렸을 적 우리 집에는 초대와 무관한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친가, 외가, 진외가 등 부모님을 중심으로 이어진 친인척들과 촌수를 따지기도 뭣한 먼 일가들이 명절이나 집안 제사, 하다못해 장날 특별한 용건 없이 드나들었다.
그들이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어린 나로서는 대부분 이해할 수 없어 생각나지 않지만, 그 광경은 생생하다. 울 정도로 배꼽 잡고 웃다가 허기지면 자주 돌아오는 생일 떡이나 국수를 끓여 먹기도 했다. 버스 시간에 누군가는 떠나고 다른 이가 그 자리를 채워도 대화는 탈 없이 이어졌으니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땐 왜 그렇게 심심했던지, 학교를 파하고 놀다가 집에 왔어도 저녁 식사 때까지 하루가 참 길었다. 일없이 곤충을 잡아 빈 병에 넣어 관찰하기도 했으니 손님으로 집안이 북적이면 싫지 않았다. 구석에 엎드려 숙제하는 것처럼 뭔가를 끄적거렸지만, 실은 어른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TV가 없던 시절 그들의 만담은 내게 연속극 재방송 같았는데, 왜 어른들은 비슷한 이야기에도 매번 재미있어할까 의아했다. 평교, 주산, 동진, 성내, 소성, 이평 등지에서 온 착하디착한 사람들, 그들의 자손은 지금 전주나 서울, 그리고 그 주변 어딘가 아파트에 살고 있을 것이다.
하도 많이 들어 귀에 못 박힌 군대 이야기 하나를 소개한다. 훈련은 고된데 부식이 형편없던 시절, 중대장이 애지중지 키우던 토끼 한 마리가 사라졌다고 한다. 끝내 범인이 나타나지 않자, 중대원들 전부 연병장에 집합시켜 놓고 “토끼가 왜 죽었나”라는 구호로 토끼뜀을 시켰다는 이야기다. 기억이 부실한 탓도 있지만 옮겨 쓰고 보니 별 시답지도 않다. 누군가의 뱃속에서 이미 소화가 돼버렸을 토끼로 화난 사람은 중대장 한 사람이었을 뿐, 부대원들 모두 전우애로 똘똘 뭉쳐 그 기상천외한 구호를 외치며 뛰었을 상황은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다른 이야기가 된다. 화자도 어쩌면 자신이 직접 경험한 이야기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군대 이야기에 으레 들어가는 과장은 당연하고, 앞뒤로 높으신 중대장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장치가 들어가면 한 편의 완벽한 소극이 된다. 다음번 장날에 새로운 청중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이야기는 재현됐을 것이니 볕이 잘든 우리 집 마루는 일종의 소극장이었던 셈이다.
나는 논문이나 책을 저술할 때 비유를 즐겨 쓴다. 내용보다는 저술 중에 나온 비유가 좋다는 말을 간혹 듣는다. 그리고 대화나 강연 중에 ‘예를 들어’나 ‘비유컨대’로 새로 시작할 때가 많다. 그 말투는 단언컨대 장날 우리 집 손님들의 대화에서 익힌 것이리라. 그들은 자기 말에 집중케 하려고 월남전, 농사, 하다못해 소, 돼지, 닭까지 소품으로 썼다. 그 과정에서 비유와 우화, 메타포가 등장했고, 어린 나는 이런 문화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사회과 부도에서 본 나라와 광주, 부산 등 대도시, 어른이 되어야 가는 군대를 그려볼 수 있었다. 상상력이란 근육이 있다면 그때 부쩍 자랐을 것이다.
주교황청 한국대사를 지냈던 성염 교수가 번역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비록 내륙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소싯적부터 조그만 잔에 담긴 물을 보고도 나는 바다를 상상할 수 있었다.” 감히 이에 견줄 바 못 되지만, 장날과 명절 어른들의 대화는 내게 재미있는 이야기책이자 상상의 세계였다.
/남형두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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