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남원의 독립만세 의거를 자세하게 조명한 책이 나왔다.
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독립운동사연구소가 총서 1호로 발간한 <이성기·용기 형제와 남원3·1독립만세의거> (광문각)이다. 이성기·용기>
이 책은 30년간 독립유공자 포상에 힘 써온 이태룡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장이 남원 독립만세 의거를 주도한 이성기 열사 손자의 요청을 받아, 3년 동안 관련 자료를 정리해 발간했다. 손자인 이석문씨가 인천대 독립운동사 연구소를 방문해 “조부 형제뿐만 아니라 묻혀 있는 남원 전체 3·1독립만세의거를 밝혀달라”고 했다는 전언이다.
책은 남원에서 1919년 4월 4일 독립만세의거가 일어나는 과정을 자세히 담고 있다. 책에 따르면 남원의 독립만세의거는 전주 이씨 효령대군파·영해군파가 주축이 돼서 계획했다.
효령대군파는 덕과면에, 영해군파는 사매면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는데, 덕과면장 이석기(李奭器)가 ‘식수기념일’인 4월 3일 두 마을 사람들을 계명당 고개와 사율리 동해골에 모았다. 도로 보수를 하는 모습으로 가장해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 위해서다.
이날 동원된 수백 명의 사람들은 나무를 심은 뒤 시위를 했다. 그러나 이석기를 비롯한 시위 주도자들은 남원헌병대에 유치됐다.
그 날 밤 사매면 대신리 사람들은 이성기의 집에 모여 대규모 시위를 벌여 남원헌병대에 유치된 인사들을 탈환해 오기로 의견을 모았다.
동생인 이용기가 자택에서 ‘大韓獨立旗巳梅面’(대한독립기사매면)이라고 쓴 깃발을 만든 뒤, 이튿날 남원 북시장에서 대나무 끝에 매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순식간에 1000여 명의 군중이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나섰다.
시위 현장에서 일본 군경의 총탄에 5~8명이 순국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의거를 주도한 이성기는 체포돼 경성감옥(경성형무소 전신)에, 이용기는 광주감옥 전주분감(현 전주교도소)에 수감됐다. 이용기는 2년 3개월 동안 옥고를 겪다가 1921년 6월 27일 출옥했고, 이용기는 병보석으로 출옥했으나 후유증으로 36세에 세상을 떠났다.
책은 총 3부로 구성됐다. 제1부는 ‘이성기·용기 형제 애국지사의 삶’을 엮었고, 제2부는 ‘남원 3·1독립만세의거’와 관련된 내용을 정리했다.
제3부 ‘판결문’이다. 남원 3·1독립만세의거와 관련된 판결문 13개, 남원·임실 출신이 함께한 임실 오수리 독립만세의거 판결문 3개가 실려있다.
이태룡 소장은 “남원 3·1독립만세시위로 인해 순국한 의사, 옥고를 치른 지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의거의 진실이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이 소장은 경상대 사범대 국어교육과에서 학사·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전공은 의병문학이다.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재직하던 1986년부터 의병연구를 시작했으며, 공로를 인정받지 못한 유공자를 발굴해왔다. 주요 논저로는 ’운강 이강년의 도체찰사 제수와 순국과정 연구’등 20여 편의 논문,‘한국 의병사’(상·하) 등 27종 38권의 단행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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