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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112)결사항전의 그곳, 웅치

웅치일원 고지도(1872년 지방지도(상) 1918년 지도/사진=완주군 제공
웅치일원 고지도(1872년 지방지도(상) 1918년 지도/사진=완주군 제공

 ‘결사항전(決死抗戰).’ 죽을 각오로 맞서서 싸우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는 우크라이나 지도자와 국민의 결사항전을 바라보며 임진왜란 당시 호남을 지켜낸 ‘웅치전투’를 떠올려 본다.

웅치는 지금의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에서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일원에 자리하고 있는 지역이다. 곰티로도 불리는 웅치는 예로부터 금산과 완주 경계의 이치(배티재)와 더불어 전주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 옛 웅치길인 덕봉길과 또 다른 웅치길인 곰티재길을 품은 곳으로 계곡이 깊다. 지금은 일제가 1910년대 낸 곰티재 신작로가 옛길 인근에서 진안과 완주를 잇고 있으며 익산 포항 간 고속도로가 그 위를 가로지르고 있다.

옛 웅치길(좌), 곰치재 신작로(우 상),익산-포항간 고속도로(우 하)
옛 웅치길(좌), 곰치재 신작로(우 상),익산-포항간 고속도로(우 하)

1970년대에 험준한 산길을 우회하는 모래재길도 생기자 옛 웅치길과 곰티재 신작로를 지나는 발길이 뜸해졌지만, 지금도 오롯이 남아 있는 옛길을 걸으며 선조들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사계절 깊은 골짜기가 자아내는 풍경이 아름답지만, 그곳에는 임진왜란 당시 치열한 전투가 치러진 흔적을 담은 이야기가 곳곳에 전해지고 있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3일(음력) 왜군 선발대가 부산성을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한양을 향해 파죽지세로 왜군들이 쳐들어오며 마지막 방어선이라 여긴 탄금대마저 함락되자 선조는 4월 30일 피난길에 나섰고, 3일 후인 5월 3일 왜군 1진이 조선 침략 20일 만에 한양에 입성한다. 조선의 수도에 들어왔지만, 선조를 놓친 왜군은 그 뒤를 쫓으며 조선 팔도를 분할 지배하려는 전략으로 조선의 각 방향으로 쳐들어간다.

전라도 지배를 위해 전주성을 점령하려 이치와 웅치를 지나는 왜군에 대항하며 치러진 지역의 전투에 따라 웅치전투 이치전투라 칭했다. 그 중, 웅치전투는 관군과 의병이 전라도를 진격하려는 왜군에 대항하여 전주와 진안의 경계였던 웅치 일대에서 안덕원에 이르기까지 결사항전으로 저지하며 치열하게 싸운 전투이다. 

웅치에서 전투가 벌어지기 앞선 6월 23일 금산성이 함락된다. 6월 말 왜군이 전라도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전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진안을 지나 웅치를 통해 전주 공격을 감행하고자 움직이자, 김제군수 정담, 동복(현 화순)현감 황진, 해남현감 변응정, 나주판관 이복남 등 관군이 배치되었고 정찰을 나선 황진이 왜군 선봉을 격퇴한다. 

관군은 물론이고 3대 독자로 무과에 급제 후 시묘살이를 하다 의병 200여 명을 모집한 의병장 황박을 비롯하여 진안의 선비 김수·김정 형제와 지역의 민초들이 의병으로 합류한다. 대략 1만여 명으로 추정되는 왜군에 맞선 당시 조선군은 대략 왜군의 십 분의 일인 천여 명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정확한 규모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알 수 없다.

웅치 방어에 나선 조선군은 일대를 3개의 진으로 나누어 방어선을 구축했다. 최전선 격인 산 아래의 제1 방어진지는 황박과 관군인 오정달이, 중턱의 제2 방어선은 이복남과 변응정이 맡았고, 정상부의 제3 방어선은 지휘부인 정담이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조선군은 왜군에 결사항전으로 맞섰지만, 왜군의 지속적인 공격과 무기의 열세로 1,2차 방어선이 무너지자 최후의 방어선인 웅치 정상부에서 대부분 전사하였다.

『수정선조실록』에는 7월 7일 왜적의 선봉 수천 명에 대항하여 싸운 이복남과 전투가 본격적으로 치러진 7월 8일의 전투를 소개하며 황박과 백마를 탄 적장을 쏘아 죽인 정담의 활약이 기록되어 있다. 수세에 몰려 적들에게 포위된 정담에게 부하들이 후퇴를 권유하자 “차라리 적병 한 놈을 더 죽이고 죽을지 언정 차마 내 몸을 위해 도망하여 적으로 하여금 기세를 부리게 할 수 없다”며 동요하지 않고 맞서다 순절한 정담과 조선군의 기록이 전해진다.

 

왜장바위(좌),옛 성황당터(우)
왜장바위(좌),옛 성황당터(우)

그 흔적은 능선을 넘어오던 백마 탄 적장을 정담이 큰 바위에 매복하여 잡아 명칭이 유래된 ‘왜장바위’와 작은 진천골, 진천골 그리고 적들이 들어온 곳이라 불려진 적래천 등이 지명으로 남아 있다. 또한, 유성룡은 『징비록』에 왜군이 힘써 싸운 조선군을 가상히 여겨 조선군의 시체를 묻고 ‘조선의 충성스런 넋을 기린다(弔朝鮮國 忠肝義膽)’라 쓴 말뚝을 세웠다는 일화와 함께 그들로 인해 “전라도만이 홀로 온전하였다”고 기록했는데, 그 무덤으로 추정되는 돌무덤이 오랫동안 성황당터로 알려진 채 남아 있다. 

이후 왜군은 7월 9일 웅치를 넘어 안덕원으로 진출했지만,  사력을 다해 싸운 조선군과의 웅치전투에서 심각한 손실을 본 왜군은 황진에게 패배하고 전주성의 방어태세에 전의를 상실하고 결국 퇴각한다. 웅치전투는 호남에서 부족한 물자를 조달하려던 왜군의 전략을 무력화시키며 왜장까지 전사하여 일본에서도 크게 패한 전투로 여겼다고 하며 조선군에게는 승리의 발판이 되며 전라도를 지켜내게 한 전투였다.

 

창렬사 앞 약무호남시무국가 비석
창렬사 앞 약무호남시무국가 비석

웅치전투 영웅들을 모신 사당 창렬사 앞에는 “만약 호남이 없다면 나라가 없었을 것이다(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이순신 장군의 유명한 문구가 굳건하게 세워져 있다. 그동안 웅치전투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관과 학계·언론은 물론이고 지역민이 힘을 합치고 있다. 관군과 무명의 선조들이 남겨준 흔적을 올곧이 찾아 호남을 지켜 조선을 구한 웅치전투의 의미를 바로 세우고자 하는 행보가 바람직하다.

지금의 우리는 전염병의 긴 터널을 어렵게 지나고 있지만, 선조들이 지켜내고자 결사항전으로 염원했던 땅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봄이 오는 길목, 깊은 계곡에 아로새겨진 웅숭깊은 흔적을 따라 창렬사와 돌무덤에 봄꽃을 올리며 “고맙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라며 큰절을 드리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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