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도 대학 수학능력시험은 지난 11월 17일에 끝났고, 12월 9일에는 성적까지 개별 통보된 마당에 수능시험문제 얘기를 하려니 다소 뜬금없는 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은 이번 수능의 한국사 문제에 우리 전북 부안출신으로서 고려 말에 목민, 정치, 외교, 학문, 문학 등 다방면에서 큰 공적을 남긴 문정공(文貞公) 지포(止浦) 김구(金坵) 선생의 시 「철주를 지나며(원제:과철주過鐵州」가 제시문으로 출제되었기 때문이다.
김구 선생의 시가 수학능력시험 출제의 자료가 되었다는 것은 선생의 시가 그만큼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절실하게 묘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를 ‘시로 쓴 역사’라는 뜻에서 ‘시사(詩史)’라고 한다.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으로서 한자문화권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받는 두보(杜甫)의 시를 ‘시사’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두보가 ‘안록산의 난’을 직접 겪으면서 당시의 비참한 상황을 날카로운 필치로 진실하고 처절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 수의 시는 만민을 울리는 노래가 되기도 하고, 후대에 길이 전해져서 역사를 증명하기도 한다.
고려 고종 18년인 1231년, 살리타이가 이끄는 3만의 몽골군은 함신진을 점령한 후 철주성에 이르렀다. 살리타이는 포로로 사로잡은 고려의 서창낭장(瑞昌郎將) 문대(文大)에게 철주성을 향해 “항복하라”고 외치게 했으나 문대는 오히려 “항복하지 마라!”라고 외치다가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철주방어사 이원정(李元禎)과 판관 이희적(李希勣)은 몽고군이 대부분 기병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군민들과 병력 2,500명을 평지에 위치한 철주읍성으로부터 산에 자리한 철주산성으로 옮기고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보름 동안의 치열한 전투 끝에 식량이 떨어져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이원정은 남은 화약을 적에게 넘겨 줄 수 없다며 화약고에 불을 놓아 처자와 함께 불길에 뛰어들어 자결했고, 이희적 또한 성안의 백성들과 함께 불 속으로 뛰어 들어 방어전을 펴던 관민 모두가 자결하였다. 참으로 처참한 전쟁이었다. 김구 선생은 29세에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가면서 철주를 지나게 되었을 때 당시의 처참한 전투와 장렬한 전사를 회고하며 이 시 「철주를 지나며」를 지은 것이다. 시는 이렇게 끝맺음 되어 있다. “화약고가 붉은 불을 뿜던 어느 날 저녁, 즐거이 처자와 함께 재로 변하였네. 충성스런 그 혼과 장한 넋은 어디로 갔나? ‘철주전투’라며 고을이름만 속절없이 남아 있겠지…”
지포 김구 선생은 24세에 초임으로 제주판관이 되어 태풍과 야생동물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하고 경작지의 경계를 분명히 구분하기 위해 밭담 쌓기를 정책으로 시행함으로써 오늘날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제주밭담이 있게 한 인물이다. 빼어난 문장으로 몽골의 원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도맡아 작성함으로써 외교로 고려를 지켰는데, 『동문선』에 그의 시문이 95편이나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 그의 문장력을 입증하고 있다. 유학진흥에 진력하여 성리학이 유입되는 바탕을 마련하였고,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국립통역관양성기관인 통문관을 설치하는 등 많은 공적을 남겼다. 관직은 정승의 반열인 평장사에 이르렀다. 2023년 수능시험에 선생의 시가 출제의 소재가 된 것을 기회로 전북의 자랑인 선생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가져야 할 것이다.
/김병기 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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