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한 달간 춘천에 머문 적이 있다. 6개월간 연구 연수를 맞아 지역살이를 기획했는데, 춘천문화도시센터가 받아들여 나를 춘천으로 초대했다. 프로그램은 Thinker in Residence. 오스트리아에서 시행한 이 사업은 말 그대로 연구자들에게 지역에 머물며 연구하고 거주하도록 하는 것이다. 예술가 레지던스의 연구자 판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이 프로그램은 내가 지방의 모 연구원에 제안했던 것이다. 특정 분야에 집중된 정부연구원과 달리 여러 분야를 연구해야 하는 지방연구원 여건상 연구인력이 부족하기 마련인데, 나처럼 연구 연수를 하거나 잠시 쉬며 미래를 준비하는 연구자를 불러들여 지역을 연구하도록 하면 어떻겠냐는 게 내 제안이었다. 당시 그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춘천문화도시센터가 흔쾌히 받아들여 첫 Thinker in Residence를 진행했다.
처음 살아본 춘천은 참 매력적이 도시였다. 아침마다 뿌연 안개를 피워내는 의암호는 춘천을 신비롭게 만들었고, 봉긋이 솟아올라 춘천을 조망하는 봉의산은 어머니처럼 늘 푸근했다. 마주 선 석사천은 시민들의 놀이터로 다양한 활동의 공간이었고, 그 안에 형성된 도시는 다양한 먹거리로 꽉 채워져 있었다. 오죽했으면 SNS에 ‘닭갈비만 포기하면 춘천의 맛이 보인다’라고 했을까? 난 매일 자리에서 일어나 자전거로 의암호를 달렸고, 하루 3만 보 이상 걸으며 춘천이 가진 가능성과 가치를 찾으려 했다.
한 달 후 난 결과를 보고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말하려는 건 아니다.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춘천이 남긴 흔적들에 대한 것이다. 내 보고서가 춘천에 어떻게 쓰였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춘천은 나에게 매우 진한 흔적을 남겼다. 지친 삶을 위로받았고, 도시를 연구하는 처음 시절로 돌아가 기본자세를 새롭게 했으며, 여러 사람과 사귀었다. 매너리즘에 빠진 나를 구했다고 할까? 무엇보다 춘천에 대한 관심을 얻어 얼마 남지 않은 정년 이후 춘천에서 거주할까 생각 중이다. 이제는 감당하기 어려운 서울을 떠나 춘천이라는 도시에서 새롭게 지역을 연구하고 강의하며 지역을 기획하는, 자그마한 기여라도 하면 어떨까 생각 중이다.
관계인구, 생활인구. 지역소멸에 대응해 여러 제안이 나온다. 나는 그런 지역에 다양한 형태의 레지던시 프로그램 운영을 권하고 싶다. 나처럼 연구자도 좋고, 기획자나 혁신가, 디자이너, 전통적인 예술가도 좋다. 지역을 연구하고 새롭게 하고픈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정 기간 머무르며 지역을 학습하고 연구하며 새로운 실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줘보자. 그럼 뭔가 나오지 않겠는가? 또 설령 나오지 않더라도 나처럼 지역에 살아보고자 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겠는가? 그게 관계인구, 생활인구를 늘려 가는 것이라면 그것도 성공 아니겠는가?
미래에 지역은 혁신에 달려 있다. 누가 시대에 맞는 코드에 맞춰 자신을 혁신할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그렇기에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지금은 주 4일제의 시대이고, 워케이션(workation)의 시대이며, 한달살이를 포함해 다양한 지역살이를 꿈꾸는 취향의 시대다.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지난 6개월 ‘타향에서’를 쓰며 떠나온 고향을 생각해 봤다. 생각보다 진하게 흔적을 남긴 것 같다. 그간 감사함을 전하며 앞으로 전북의 파이팅을 기대해 본다.
/라도삼(서울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문화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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