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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가을의 숲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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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

달궈진 오븐 속 같던 여름의 열기가 사라지니, 입맛을 찾고 숙면을 취한다. 아침마다 한결 쾌적한 공기 속에서 기지개를 켜면 가슴에 밝은 기분과 낙관적인 희망이 깃든다. 교하의 가로수인 벚나무 잎은 벌써 반쯤 단풍이 들었다. 요즘 교하도서관 뒤편에서 중앙공원을 잇는 숲길을 걷다가 빽빽한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들 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만날 때 홀로 큰 감동을 받는다. 숲길 바닥에는 도토리가 뒹굴고, 내 부주의한 발밑에서 밟힌 도토리는 여지없이 으깨진다. 

여름이 끝나자 빛과 그림자의 존재감은 옅어진다.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의 발 아래 그림자가 지고, 땅에 단단한 몸통으로 서 있는 나무 아래에도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들이 암시하고 일러주는 철학적 진실은 무엇인가? 낙엽이 활엽수의 그림자라면 재는 장작불의 그림자가 아닐까? 그림자란 음의 세계가 빚은 빛의 주검이고 잔류물! 그림자와 실체의 운명은 늘 하나로 움직인다. 그렇다면 죽음은 생명이 제 안에 드리운 그림자일 것이다. 

나무들은 빛으로 광합성을 하며 성장한다. 빛이 없다면 나무는 자랄 수 없다. 나무들이 태양의 열기를 차단하는 까닭에 숲속 공기는 바깥보다 시원하다. 숲속에서 공생하는 나무들은 사회화된 존재다. 나무는 수직으로 서고 땅속 뿌리는 복잡하게 엉켜 있다. 나무들은 뿌리는 뿌리대로, 줄기와 가지는 그것대로 엮이고 얽힌 채로 공생한다. 숨 쉬고 바스락거리며 수런거리는 나무들. 우리는 나무들이 잎맥과 미립자를 가진, 호흡하고 제 나름의 신경계를 가진 생명 개체라는 엄연한 사실을 자주 잊는다. 

따져보면 인류는 숲의 자식들이다. 우리 선조는 숲의 열매와 씨앗, 뿌리를 채취해 식량으로 삼고, 숲에서 안전한 잠자리를 마련했다. 숲은 우리 삶의 터전이고, 의문의 여지없이 우리 운명의 강략한 원소 중 하나였음을 인정해야 한다. 인류는 숲의 부양을 통해 제 생명의 필요와 욕망을 충족하며 공생하는 지혜를 발휘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인류가 숲의 피부양 가족의 일원이란 점에서 우리는 한 형제인 것이다. 인류학자 팀 잉골드는 ‘조응’이란 책에서 ‘인간 몸의 상당 부분은 나무 형상의 공기다. 따라서 이 나무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우리 모습을 보여준다. 뻗어나간 나뭇가지의 구조는 폐, 둥글게 얽힌 뿌리는 입, 우거진 숲 지붕의 형태는 숨이다’라고 쓴다. 나무들은 사람에게 신호를 보내고 말을 건넨다. 하지만 우리는 그걸 듣지 못한다. 나무는 인간을 속속들이 알지만 우리는 나무를 알지 못한다. 인간의 무지몽매함 탓에 제 형제를 베고 제재소에서 몸통을 자르며 쓸모가 덜한 뿌리와 잔가지를 불태운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인간은 숲을 토벌하고 빈 땅을 공동 거주지나 경작지로 바꾸었다. 그 과정에서 제 양육자인 어머니 숲을 살해한 사태는 인간의 무분별한 탐욕과 무지로 빚어진 잔혹한 일이다. 인간은 한 점의 죄의식도 없이 지구 자원을 마구 퍼 쓰고, 다른 동물의 피해를 끼치며 지구 생태계를 망가뜨렸다. 펜데믹 초기 엄격한 봉쇄 조치와 이동을 제한하자 자연은 놀라운 회복력을 보였다. 대기와 물이 깨끗해지고, 야생동물이 자주 도심에 출몰했다. 인간이 활동을 멈추자 자연 생태계와 동물 서식지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인간이 지구 생태계의 유해종이라는 낙인은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이 오명을 벗으려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사유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동료 인간에게 더 두터운 이타적 우정을 쌓고, 숲과 우리가 생명 공동체 안에서 공존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오늘도 고즈넉하고 조용한 숲속 오솔길을 걸으며 디지털 기기의 소음과 번잡함에서 풀려나며 홀가분한 자유를 만끽하며 사색에 몰입한다. 산책하는 내내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은 잦아들고 대신 고요와 기쁨이 찾아든다. 고요가 빚은 사색 속에서 우리의 무의식에 각인된 정체성이 수목 인간이라는 걸 말하는 게 아닐까 라고, 나는 혼자 생각해 보는 것이다.

/장석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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