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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JIFF]개막작 민병국 감독 '가능한 변화'

 

수천 수만 년을 살아 왔어도 우리들은 유감스럽게도 이 세상 대한 그 어떤 확신을 구하거나 해석을 해내지 못했다. 그만큼 삶은 애매하고 모호하며 불가사의하다. 이 불가사의한 삶을 해석하고 변화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우리들은 삶의 의문투성이에서 한치도 헤어나지 못한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감동은 꿈이고, 허위 아니면 허구다.

 

나는 아침 5시 반쯤 일어난다. 신문을 보고, 화장실을 가고, 거울을 보며 면도하고, 샤워하고, 아내를 깨우고, 아내랑 몇 마디 이야기하고, 밥을 먹으면, 아내가 평화동 사거리까지 나를 태워다 준다. 차안에서 음악 듣고, 아내는 이따금 내 손을 잡고, 그리고 차에서 내려 카폰 하는 차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곳에 벚나무가 있고, 벚나무에 사계절이 있다. 차를 기다리는 동안 어제 본 사람들이 지나가고, 차가 오면 나는 차를 타고 학교로 간다. 반복되는 이 일상을 세밀하게 찍으면 영화다. 생각해보면 지난 인생은 꿈만 같다. 영화는 지나가버린 삶이나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꾸며서 우리 앞에 꿈처럼 펼쳐 놓는다. 내 앞에 펼쳐진 남의 일 같은 나의 삶을 확인하고 우리는 때로 놀란다. 도대체, 삶이 꿈인가. 꿈이 삶인가. 삶과 꿈, 현실과 이상, 영화와 현실, 삶과 죽음이 때로 애매 모호하게 경계가 지워질 때가 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은 또 현실과 깊이 닿고 부딪치며 비명을 지른다.

 

일상적 삶의 근원적인 물음과 그 풍경에 담담하게 카메라를 고정시켜 놓은, 영화 '가능한 변화'는 두 남자와 두 여자의 일상에서의 일탈을 아무 장식 없는 눈으로 무심하게 따라다닌다. 이 무덤덤함 때문에 영화는 더 리얼하게 생생해지고, 이 넷은 누추하고 초라하게 망가지고, 그래서 불쌍하고 쓸쓸하다. 영화와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의 경계를 지운 이 영화 속의 풍경들은 어디서 본 듯, 낯이 익은 듯, 내 일인 듯, 남의 일인 듯 그 경계가 흐릿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철학적이기보다 문학적이다.

 

모든 예술, 아니 삶에서의 감동이 허위 또는 허구라는 것을 보여주는 이 영화의 리얼리티는 매우 설득력 있게 우리들을 영화의 현실 속으로 끌어들이며, 시선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이런 이 영화의 힘은 어디서 오는 걸 까.

 

바다를 향해 홀로 앉아 있는, 나를 닮은 이 외로운 사내의 앞과 뒤는 푸른 하늘 아래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인 문호와 종규는 이 지루한 삶에서 안간힘으로 '가능한 변화'를 찾는 나이고 너다. 그러나'가능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구원은 뻥이다. 이 영화는 그렇게 말한다. 아니라고 우겨도 소용없다. 우리는 살고, 인생은 다 힘들고 두루 아프다. 그리고 이 영화는 나에게 전혀 다른 말로 또 속삭인다. 그러니까 "'존재'가 '힘'이야”라고. 이 참담한, 이 혼돈의 곤혹스러운, 이 지겨운, 이 '현실'이라니.

 

/김용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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