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글게 휜 늑골을 만지면서는, 그렇지, 내가 대여섯살이 넘어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도 이 뼈를 어루만지며 젖을 먹었지, 널찍한 골반을 들어내면서는, 바로 이 안에서 내가 열달동안 생명을 키우며 들어앉아 있었지, 팔다리의 잔뼈를 주워모으면서는, 그래, 바로 이 잔뼈들이 어느 한 순간 쉴 틈도 없이 품을 팔아 나를 먹이고 입히고 높은 학교까지 나오게 해주었지…… 갖가지 뼈들을 만질 때마다 나는 마치 살아있는 어머니라도 대하듯 어떤 온기마저 전해져 오는 기분이었다.”
이 글은 소설가 송기원의 ‘사람의 향기’라는 연작소설 가운데 ‘사춘아부지’에 나오는 대목이다. 이 소설에서 작가인 ‘나는’ 민주화운동에 연루돼 감옥에 들어간다. 그 사이 어머니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어느 공동묘지에 버려지다시피 묻혔다. 20여 년이 지나서 나는 임종은 커녕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죄책감에 화장을 해드리기로 결심한다. 날을 잡아 포크레인으로 무덤을 파헤친 후, 직접 어머니 유해를 하나하나 들어 내어 상자에 담는다. 뜻밖에도 저승과 이승의 거리감이 아닌 온기가 전해오는 것이다.
오래전 심심파적으로 책장을 넘기다 이 대목에서 눈이 멈추었다. 찌르르 전기가 온 몸을 휘감는 느낌을 받았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이만큼 절절하게 표현한 것이 또 있을까 싶어서였다.
올해 초 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어머니를 모시고 시골집에 가던 길이었다. 팔순을 훌쩍 넘기신 어머니는 일년중 절반가량은 서울 형님댁에서, 나머지는 시골집에서 지내신다. 시골집에 혼자 계실 때는 나와 동생이 2-3주 간격으로 들르곤 했다. 면소재지인 이곳에는 목욕탕이 없다. 그래서 갈때마다 정읍이나 담양 읍내로 모시고 가서 목욕을 시켜 드려야 했다.
이날도 목욕탕에 들른 뒤, 정읍에서 가파른 내장사 고갯길을 막 넘던 참이었다. 설핏 눈발이 날리고 길이 조금 미끄러웠다. 그 때 위에서 내려온던 시커먼 차가 급커브길에서 이쪽 차선으로 미끄러지면서 덮쳐오는게 아닌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사고로 차는 박살이 났고 나는 눈을 뻔히 뜨고 당해 버렸다.
문제는 어머니였다. 뒷자리에 타고 있던 어머니는 무방비 상태여서 크게 다치셨다. 다리 골절상을 입고 어깨와 가슴 부위를 다쳐 비명을 지르고 계셨다. 당황했지만 곧 바로 119를 불러 전주로 이송, 병원에 입원했다.
이후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기브스를 한 어머니는 극심한 통증과 함께 며칠씩 구토를 했고 혈압이 200을 오르내렸다. 차차 안정을 찾긴 했으나 소변줄을 이용해 소변을 빼내고 관장을 시켜드려야 했다. 낮에는 간병인에게, 밤에는 내가 맡아 수발을 들었다. 그런 병원생활이 4개월째 접어든다. 생활은 엉망이 됐고 몸도 성한데가 없는듯 하다.
하지만 고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이후 모시고 지낸 날이 많지 않았는데 밤마다 같이 지내게 된 것이다. 이제 얼마나 수(壽)를 누리실지 몰라도 같은 지붕아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나날이다. 화장을 위해 추스리는 무덤속 뼈에서도 온기를 느끼는데 이만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5월은 어버이날이 있는 달이다. 어버이 살아계심 자체가 축복이 아닐까 싶다.
/조상진(전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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