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공주는 창건발원자이며, 사택적덕녀인 왕후는 서탑 사리봉안의 발원자다?"
24일과 25일 전북도청 3층 중회의실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학술회의 '대발견 사리장엄! 미륵사의 재조명'에서는 선화공주와 서동요에 대한 신빙성 여부와 미륵사 창건발원자가 과연 누구인지가 이슈로 떠올랐다.
또한 미륵사 사리장엄에 대한 미술사적 분석이 집중조명되면서 미륵사 사리장엄 발견과 함께 재점화된 익산 왕궁리 5층 석탑 사리장엄구 제작시기가 백제시대라는 주장이 다시 힘을 얻었다.
이날 학술회의는 전라북도와 익산시가 주최하고 원광대마한백제문화연구소와 백제학회가 주관한 것. 현재 각 학회에서 설전을 벌이고 있는 토론이 서탑 사리봉안기만 가지고 미륵사의 성격을 단정지으려고 한다는 우려도 제기됐으며, 플로어에서는 무왕의 익산 천도설에 대한 관심이 더 뜨거웠다.
▲ 미륵사 창건은 누가 발원했는가?
사리봉안기('아 백제왕후 좌평 사택적덕녀(我百濟王后沙宅績德女)') 내용과 관련, 왕비가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해석이 학계의 대세로 자리잡아 가면서 미륵사의 창건발원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사리봉안기를 '우리 백제왕후와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 해석, '우리 백제왕후'를 「삼국유사」가 미륵사 창건주체로 기록한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로 주장했던 홍윤식 동국대 명예교수는 이날 학술대회에서 '우리 백제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이시니'로 읽어야 한다고 교정했다. 홍교수는 "무왕과 선화공주에 얽힌 서동요는 미륵신앙을 통해 선화공주가 백제로 와서 무왕과 함께 미륵사를 창건하게 될 것을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라며 "즉 미륵사의 창건발원자는 선화공주이고 창건주체는 선화공주를 비롯한 무용, 지명법사 등으로 볼 때 선화공주는 창건발원자이며 사택적덕녀인 왕후는 서탑 사리봉안의 발원자"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사리봉안기를 최초번역한 김상현 동국대 교수는 "사리봉안기에 의하면 미륵사는 백제왕후 사택적덕의 딸이 정재를 희사해 세운 것으로, 당시 사택적덕의 딸인 왕비의 경제력도 대단했던 것 같다"며 "사리봉안기가 서탑에서 나왔다고 해서 사택왕후가 서원의 창건만을 발원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택왕후가 세운 가람은 곧 미륵사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지 서원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박중환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미륵사 사리장엄 출토로 서동설화를 논리적으로 재조명하고 재해석해야 할 시점이 강제적으로 온 것 같다"며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서동과 선화 공주의 로맨스는 불합리했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서동이 진짜 무왕인지 다시 해석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김교수의 주장에 대해 "사리봉안기가 가람 전체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섣불리 받아들일 수 없다"며 "다른 사례에서 발원대상자와 발원자 모두가 복수인 경우를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 미륵사지 사리장엄에 대한 미술사적 가치 조명
미륵사 사리장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익산 왕궁리 사리장엄이 미륵사와 같은 시대인 백제시대 유물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동안 왕궁리 5층 석탑 사리장엄구는 통일신라 혹은 고려시대 유물로 알려져 있었지만, 2005년 한정호 동국대 박물관 연구원에 의해 백제시대 유물이라는 의견이 본격적으로 제기됐었다.
강우방 전 이화여대 초빙교수는 "왕궁리 석탑 사리기의 표면 영기문과 미륵사 서탑 사리기의 표면 영기문은 같은 장인의 솜씨"라며 "왕궁리 상자형 뚜껑의 삼각형 네 면과 왕궁리 사리병의 사각판의 무늬는 미륵사 항아리의 제4층의 무늬와 같고, 왕궁리 상자형 사리기의 네 면은 미륵사 사리기의 제4층과 2층의 무늬의 표면원리를 합쳐 놓은 것 같다. 그 밖의 둥근 무늬나 빗금치는 형태와 솜씨는 같다"고 설명했다. 강교수는 "두 사리기의 무늬를 직접 그려보면 백제시대의 같은 공방에서 두 사리기가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김선기 원광대박물관 학예관 역시 "정밀한 조사가 이뤄져야 확신이 되겠지만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가 왕궁리 유적 공방지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미륵사지 금제 사리호의 제작기법과 문양 분석'을 발표한 이송란 문화재청 문화재감정관은 "중국의 경우는 병이나 호를 일체형으로 제작하는데 반해 백제에서는 몸체 상부와 목 부분을 따로 성형한 다음 이를 제물땜으로 합체시킨 것으로 분석됐다"며 "미륵사 사리호는 목둘레 융기선이나 몸체 부분의 2줄 음각선 등은 녹로를 이용해 표면을 절삭하는 방식을 이용해 만들었다"고 발표했다.
주경미 부경대 교수는 "미륵사지 사리장엄구는 7세기 전반의 완전한 세트를 갖춘 사리장엄구로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백제 금공품의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며 "동시대 신라 및 수당대 문화와의 관계 속에서 7세기 전반 백제문화의 성격을 새롭게 알려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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