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원 500만명에 이르는 추모객. 낮에도, 새벽에도 그리고 빗속에서도, 뙤약볕에서도 끊이지 않고 이어진 추모행렬.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전국을 강타한 추모열풍에서 충격을 받은 것일까. 아니면 국면 전환의 필요성을 건의받은 것일까.
이명박 대통령이 서거정국 한달여만에 서민정치를 들고 나왔다. 이 대통령은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서민에게 따뜻한 마음이 전달되도록 해야 한다. 서민 정서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이라며 올 상반기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친(親) 서민정책’ 을 강조했다.
이에 앞서 지난달 25일에는 시민과 탁구를 치고 재래시장의 상인들과 얘기를 나누는 모습들을 언론에 내보냈다. 떡볶이집도 찾았다. 친 서민적 행보다. 하지만 경호원들을 쭉 세워놓고 어묵을 먹는 모습은 전혀 서민적이지 않다.
서민(庶民)은 벼슬이나 신분적 특권을 갖지 못한 일반 사람을 말한다. 경제적으로는 중류 이하의 넉넉지 못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때문에 항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약자이면서 비주류였다.
참여정부 시절 비주류에 대한 애정과 관심, 정책적 배려가 있었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이른바 부자내각이 탄생하면서 서민정책은 실종되고 말았다. 서민정책은 종부세 완화 등 부자정책들로 대체됐다. 서민이 들어설 공간은 좁디 좁아졌다.
헌데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서민은 유행어가 됐다. 행정 부처마다 서민대책을 챙기느라 분주하다. 그만그만한 정책들이 서민대책이란 이름을 달고 쏟아져 나오고 있다. 서민금융 지원, 다자녀가정 주거안정, 보육비 의료비 부담 완화 등등. 서민이란 단어가 대접받는 건 1년 반만이다.
서민정책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내각과 청와대 진용으로 서민정책을 추진한다는 게 어쩐지 맘에 걸린다. 이명박 정부 초대 내각의 평균재산은 39억1377만원, 지난해 4월 장·차관급인 청와대 수석비서관 10명의 평균재산은 35억5652만원이었다. 실거래가로는 100억대에 이를 것이다. 종부세 대상자들이고 버블세븐 지역에 부동산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말이 부자내각이지 서민의 눈에는 갑부내각이다. 이들이 과연 서민 눈높이로 서민정책을 제대로 추진할 수 있을까. 시늉만 내는 건 아닐까. 부자라고 해서 서민의 고통과 정서를 이해 못할 리 없지만, 가치와 판단의 DNA가 다르고 삶의 인프라가 다르기 때문에 의구심이 이는 것이다. 현장성이나 진정성도 크게 떨어질 수 밖에 없다.
갑작스런 방향선회로 인한 정체성의 혼란도 문제다. 부자내각이 부자정책을 추진하다 느닷없이 서민정책을 추진한다면 정책의 신뢰성과 일관성에도 혼선이 따를 게 뻔하다. 따라서 서민대책을 추진할려면 사람부터 확 바꾸는 게 순리이다.
서민 끌어안기는 정책을 통해 가시화될 수 밖에 없는데 정책 책임자들의 눈높이가 부자 눈높이를 갖고 있다면 배나무에 감나무를 접붙이는 격이 될 것이다. 서민들의 피부에 와 닿지 않는 것들, 이벤트성 또는 전시성 짙은 대책들만 양산될 것이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인 것은 분향소에서 꽃 한송이를 바치기 위해 서너시간씩 기다리고, 펑펑 눈물을 쏟았던 서민들의 민심을 성찰하는 일이다. 그건 국민과 거리를 두지 않았던 진정성과 순박성, 비주류와 약자에 대한 배려 아니겠는가. 그런 자세로 서민정책도 추진돼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서민 대통령 흉내 낸다는 비판만 받을 것이다.
/이경재(본지 경영지원국장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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