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에 걸린 캘린더가 달랑 한 장 남았다. 기축년(己丑年) 올 해의 끝자락, 앞으로 남은 날도 열이레 뿐이다. 이 때쯤이면 사람들은 누구나 감상(感傷)에 젖는다. '아, 또 한 해가 가는구나'. 그렇다. 무상(無常)의 세월은 달리 잡을 길이 없으므로 또 한 해가 어림없이 영겁에 묻혀 들어가는 것이다. 아쉬움, 쓸쓸함, 초조감에 더 해 비장감마저 사람들의 마음속에 드리울 때다.
그러나 나는 이런 감상과 함께 이 맘 때면 꼭 생각나는 이야기 하나가 있다. '우동 한 그릇'이란 일본 동화다. 어렵고 힘들지만 희망을 잃지않고 사는 세 모자의 사연이다. 해마다 섣달 그믐날이면 이 세 모자는 밤늦게 우동집을 찾는다. 그리고 우동 한 그을 시켜 나눠 먹는다. 주인은 이들의 어려운 형편을 알고 눈치 채지 않게 가격표를 낮춰 써놓고 면도 더 담아 준다. 세 모자는 주인의 티나지 않는 배려에 삶의 용기를 잃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 간다. 10년 후 그 어머니와 훌륭하게 장성한 두 아들은 그 우동집에 찾아와 비로소 우동 세 그릇을 시킨다. 우동집은 눈물바다가 된다.
나는 이 동화를 떠올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거린다. 그냥 가슴속에서 뭉클뭉클 감정이 복받치는 것이다. 그런것이 사람의 마음이고 순수함의 결정(結晶) 아닌가?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이런 동화속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도 얼마든지 널려 있을 것이다. 그냥 뽐내고 즐기며 우쭐거리는 졸부들도 있지만 돌아 보면 진심으로 인본(人本)을 생각하고 이웃에게 온정을 베푸는 착한 이들이 참 많다. 굳이 누구라고 드러내 놓고 칭찬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그런 선행들을 접하고, 감동하고, 널리 전파시키는 릴레이 천사의 몫을 나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상살이가 비록 힘들고 고단하다고들 하지만 아직 '살 맛 나는 세상'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연말 이웃이 훈훈해야 할 이즈음 듣기 거북한 송사(訟事) 하나가 시중의 화제다. 누구라고 하면 금방 알수 있는 전직 도내 최고위 공직자가 지난 1년여간 사실상 부인과의 갈등으로 세인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굳이 노블레스 오블리지를 들먹일것까지도 없다. 수신(修身)과 제가(齊家)를 제대로 못 해 결과적으로 노추(老醜)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의 처신이 안타까울 뿐이다. 특히 공직에 몸 담았던 사람들 사이에서 개인적 플라이버시 보호와 듣는이들의 공분(公憤)을 놓고 왈가왈부가 한창이라고 한다. 그럴 것이다. 내가 가진 윤리적 도덕적 잣대와 사회 통념상 공직자의 품행은 동전의 앞뒤처럼 따로 떼어 평가하기가 혼란스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우동 한 그릇'의 흐뭇함과 '공직의 엄중함'은 얼핏 아무 관련이 없을것 같지만 세상사가 결국 얼키고 설키며 온갖 잡사(雜事)를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면 이 연말 한번쯤 곱씹을만한 얘기거리는 되는 것 아닌가?
/김승일(본지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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